김영삼과 박근혜

 

 

1992년 대통령 선거는 TV 토론이 처음으로 실시될 뻔한 해였다.

여의도에 지지자들을 모이게 한 뒤 누가 더 많이 모았나,로 지지도를 판가름하는 것보다

TV 토론이 훨씬 더 경제적이고 후보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당시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은 TV 토론을 한사코 거부하는데,

TV 토론을 했다간 자신의 무식함이 낱낱이 드러날까 걱정했던 게 주된 이유였다.

 

강준만이 쓴 <김영삼 이데올로기>라는 명저에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김영삼의 지적 수준은 일반인 기준으로 봐도 굉장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김영삼은 측근들이 써준 원고의 순서가 바뀌어도 그걸 모른 채 계속 읽었으며,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것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등 유명한 어록을 많이 남겼다.

 

 

몇 개만 더 살펴보자.

[87년 관훈클럽 토론 때 ..... (중략) ..... 당시 패널로 참여한 동아일보 논설위원 홍인근은 핵문제에 대한 보충 질문을 김영삼에게 던졌다.

"비핵지대화에 대하여(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전술핵도 포함되는지요?"

"원자로 말씀입니까?"

"전술핵, 핵무기 말입니다."

김영삼은 반복되는 질문을 받고 결국 "아, 모른다는데 왜 자꾸 그러느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196쪽)]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었다." (199쪽)

"우르과이 사태(라운드)" (199쪽)

"정몽준(전봉준) 장군 고택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199쪽)

"역사의 아이노리(아이러니)" (199쪽)

"나는 공작정치의 노예(피해자)였다." (199쪽)

[서울 구로 지역의 한 국민학교를 방문했을 때 '결식(缺食) 아동'을 '걸식(乞食) 아동'이라고 잘못 표현해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를 해명해주기도 했으며... (199쪽)]

 

사정이 이랬으니 TV 토론에 나간다는 건 너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래서 김영삼은 ‘모든 후보가 참여하는 TV 토론’을 하자며 사실상 토론을 거부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선 때는 열 명이 넘는 후보가 난립하기 마련이며,

십여명이 자기 소개만 해도 한 시간이 간다는 점에서 이건 실현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결국 TV 토론은 열리지 못했고, 그 대신 각 후보가 TV에 나와 준비된 원고를 읽고 말았다.

 

 

 

 

 

2012년 대선의 유력후보인 박근혜는 TV 토론에 굉장히 소극적이다.

김영삼이 “모든 후보” 운운하며 토론공세를 빠져나간 반면

박근혜는 “아직 후보가 확정되지 않았다”며 토론 제의를 거부하는 중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게 야당 지지자들의 소망이긴 하지만,

문재인은 일찌감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됐고,

안철수 역시 “난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이 아니다”며 대선출마를 했다.

그 두 명이 단일화를 하든 말든, 지지도로 보아 박근혜를 포함한 이 세 명이 현재로서는 주요후보다.

세 후보 다 나름의 철학과 정책방향이 있겠지만,

TV 토론은 그런 정책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줌으로서

생업에 바빠 각 후보의 면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유권자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제공한다.

유권자들은 궁금하다.

안철수는 대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출마를 했는지,

문재인은 노무현과 어떻게 차별화를 할 것인지,

박근혜는 수첩을 보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는지 등등이.

1997년과 2002년 봇물처럼 열렸던 TV 토론들이 하나같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TV 토론을 거부한다는 것은 유권자가 자신의 실체를 알기를 꺼려한다는 뜻인데,

김영삼이야 지적 수준이 떨어져서 그렇다 쳐도

서강대 전자과를 나온 재원인 박근혜는 대체 왜 TV 토론을 거부하는 걸까?

 

 

 

사실 TV 토론은 박근혜에게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그간 기자들의 질문에도 잘 대답을 안하는 식의 신비주의 전략을 취해 온 게

“혹시 아는 게 없어서가 아닐까?”란 의심을 품게 했으니까.

‘수첩공주’라는 말이 꼭 칭찬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녀가 TV 토론에 임해서 자신의 철학을 드러내 준다면

“철학이 없다” “무식하다”같은 그간의 비난은 자연스럽게 잦아들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누가 봐도 토론을 싫어한다는 말을 듣게끔 행동하고 있으니,

세간의 의심이 증폭될 수밖에.

개콘 정여사의 말을 빌자면 “혹시...철학이 없는 거 아니야?”

물론 박근혜가 믿는 건 있다.

그녀를 선거의 여왕으로 만들어 준 영남권의 전폭적 지지는

그녀가 TV 토론을 거부하든 말든 한결같을 것이라는 그런 믿음.

하지만 안철수와 문재인이 모두 부산 사람인데다

4월 총선에서도 나타났듯이 영남 분들도 점차 후보자의 자질을 따지기 시작했는지라

이번 선거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며 스스로의 무식함을 자인했던 김영삼은

임기말인 1997년 외환위기를 국민들에게 안겨주며 대통령직을 떠났다.

그때 부산에서는 김영삼을 찍은 걸 후회한다는 의미로

‘영도다리 밑에 (잘라낸) 손가락이 가득하다“는 말이 유행했다.

TV 토론을 피해감으로써 박근혜도 어찌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지만,

임기가 끝나는 2017년, 우리 국민들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TV 토론만 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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