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이씨




2014년 8월 12일, 미국 메이저리그 팀인 캔자스시티 로얄스 (이하 로얄스)의 홈구장에서 열린 경기는
이성우라는 한국인의 시구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시구는 보통 유명한 사람이 하는 게 관례였기에
이성우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야구팬들까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누구지? 내가 모르는 유명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가수 ‘노브레인’의 멤버 중 한명의 이름이 이성우이긴 하지만,
시구를 한 이성우 씨는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1995년, 위성 TV를 통해 로얄스의 경기를 처음으로 봤고,
그 이후부터 로얄스의 광팬이 됐다.
미국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내가 보스톤 레드삭스의 팬인 것처럼,
역시 미국 경험이 없는 이성우씨가 로얄스의 팬이 된 건 그다지 신기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드삭스와 달리 로얄스는 조지 브레트라는 걸출한 선수가 뛰던 1985년 이래 무려 30년이 다 되도록 지구우승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약팀이었고,
최근 17년간은 이긴 경기보다 진 경기가 훨씬 더 많을 정도였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팬들은 구단 홈페이지에 악플을 달기 마련이다.
“감독 바꿔라!” “xx 선수 나가 죽어라!” 같은 글들이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이성우 씨는 늘 밝고 따뜻한 글들만 남겼다고 했다.
그 글을 보지 못해서 내용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잘 했지만 결과가 안좋았네요. 내일은 이길 수 있기를 빕니다. 로얄스 파이팅!”
심지어 그가 개설한 트위터 주소도 @Koreanfan_KC 였는데,
그러다보니 로얄스 사이트 내에서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 됐고,
로얄스의 댓글을 관리하는 사람으로부터 “언제 한번 캔자스시티에 오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


전설적인 선수였던 조지 브레트와 함께.


역시 명예의 전당 멤버인 프랑크 화이트로부터 유니폼을 받는 이씨.






올해 이성우 씨는 직장을 옮기면서 생긴 십여일의 휴가 때 미국을 방문할 생각을 했다.
캔자스시티에 가서 그토록 보고 싶던 로얄스 경기도 보고,
바비큐와 맥주를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댓글 관리자가 로얄스 구단 측에 “이성우라는 한국팬이 온다”는 말을 함으로써 일이 커졌다.
로얄스는 먼 곳에서 온 이 광팬에게 야구 구단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를 했다.
일례로 이성우 씨가 공항 게이트를 나왔을 때
지역 방송사에서 나온 카메라 몇 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이씨는 라디오와 TV 등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로얄스의 홈구장에서 시구를 할 기회까지 줬으니,
이성우 씨에게는 정말 꿈같은 열흘이었을 것이다.
드라마가 완성되려면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운도 따라야 하는데,
이성우 씨의 경우가 딱 그랬다.
이성우 씨가 미국 땅을 밟은 뒤부터 로얄스는 파죽의 8연승을 했고,
특히 이성우 씨가 시구를 하던 8월 12일, 로얄스는 그 경기를 3-2로 이기면서
최근 10여년 동안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던 지구 1위 자리에 오른다.




사진: 경기가 승리로 끝나고 로얄스가 지구 1위에 오르자 이성우 씨가 승리의 ‘W'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로얄스가 5회까지 한점도 못내고 있을 때 카메라는 관중석에 있던 이씨를 비춰줬고,
그러자마자 갑자기 로얄스가 점수를 내기 시작, 결국 5-0으로 경기가 끝났다.
이런 식으로 승리요정 역할을 톡톡히 한 이성우 씨는 열흘간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는데,
그가 비행기를 타는 모습이 로얄스 홈구장 전광판으로 생중계되기까지 했다.
이성우씨는 물론이고 로얄스 팬들까지 모두 행복했던 열흘이었다.

 

카메라에 잡힌 이성우 씨에게 박수를 쳐주는 로얄스 팬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이성우 씨의 엄청난 팬심이었지만,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도 한몫을 했다.
그가 영어를 못했으면 사이트에다 로얄스를 응원하는 글을 남기지도 못했을 테고,
로얄스 구단에서 이성우 씨를 주목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갑자기 영어공부를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3년 뒤부터 보스톤 사이트에 글을 써서 8년 후에 보스톤 홈구장에서 시구를 하는 게 목표다^^)




이성우 씨가 역사적인 시구를 하던 8월 12일,
또 다른 이씨도 매스컴의 화제가 됐다.
포항에 있는 H대 교수인 이씨는 코넬 대학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일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의 옆자리에는 혼자 여행하는 여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 여인이 잠들자 이씨는 음심이 발동, 여인의 가슴을 만졌고
그것도 모자라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그때 잠에서 깬 여인이 그만두라고 소리를 치자 놀란 이씨는 화장실로 도망쳤다.
비행기가 아니었다면 기회를 봐서 탈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1만미터 상공에서 이씨가 숨을 곳은 없었다.
이성우 씨가 공항 게이트를 나온 뒤 지역방송국 기자들과 팬들의 환대를 받은 것과 달리
성추행을 한 이씨를 맞은 사람들은 FBI였다.
그는 “술을 마셔서 그랬다”며 한국에서나 통할 변명을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2년 이하의 징역과 25만달러의 벌금이었다.
로얄스 팬들이 이성우 씨를 따뜻하게 맞은 것과 달리
이씨는 현재 다음과 같은 조롱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배울 게 없는 건 아니다.
지난번 윤창중 전 대변인 사건 때 우리는 ‘grab'(움켜쥐다)이라는 단어를 배웠는데,
이번에는 grope (더듬다)라는 단어가 유행이 될 듯하다.
어느 분이 grope를 이용해서 댓글을 하나 달았다.



“더듬는 자리에 앉으시겠습니까? 안더듬는 자리에 앉으시겠습니까?
“더듬는 자리요.”


브레지어에 폭탄이 들어있어서 검사하려고 했다는 조롱조의 댓글.




이씨의 제자 중 한명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우리 교수님 절대로 그러실 분 아니세요....저분 정말 좋으시고 얼마나 학생들한테 친절하고 그러신데...일단 저희 교수님이 만약 그러셨다해도...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던 걸 꺼에요.”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지만, 원래 성범죄는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저지르는 법이다.
평상시 늘 여학생을 성추행했던 사람이라면 교수직에서 진작 잘렸을 테니까.
그런데 저 학생이 생각하는, 성추행을 할 만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도대체 뭘까?



38세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성우 씨가 꿈같은 열흘을 보낸 것과 달리
47세의, 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인 이씨는 순간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한 탓에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성추행을 대하는 우리나라와 미국의 태도는 이렇게 다르며,
일전에 큰 활약을 한 윤창중 전 대변인이 서둘러 미국을 빠져나간 건 이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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