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분투기


초등학교 동창끼리 모여서 술을 마실 때, 한 친구가 날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민이 쟤 좌파야!”

뭔가를 먹으려던 한 친구(여)가 그 말을 듣고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 그런 얘였어?”

그때 이후 난 내 정체를 밝히길 꺼렸다.

모임에서 좌파를 만나면 고개를 한번 끄덕여 줌으로써 무언의 지지를 했을 뿐,

좌파로 의심될 만한 행동들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좌파는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 아무리 감추려 해도 티가 났다.

내 정체를 모르시던 장모님은 버스에서 앞자리에 앉은 두 노인들이

“서민교수, 그 사람 완전히 빨갱이야!”란 말에 질겁해서

아내에게 정말 좌파가 맞느냐고 재차 확인하다 고개를 떨구셨고,

내 처조카 한 명은 친구들로부터 “너희 이모부 좌파라며?”라는 추궁을 당해야 했다.

한국사회에서 좌파란, 이렇듯 무서운 단어다.

오늘 쓴 이 글은 좌파도 한 인간이라는 걸 알리고자 하는 취지로,

이 글이 좌파에게 덧씌워진 굴레를 벗기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2월의 어느날, 난 모 기관에서 강의가 있었다.

강의 장소가 X산이었기에 아내한테 차로 좀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차는 의외로 밀리지 않았고, 난 예정시간보다 45분이나 일찍 그 기관에 도착했다.

안그래도 차 탔을 때부터 속이 좀 안좋았기에 화장실에나 가자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에서 내리니 세 명이 날 에워싸는 게 아닌가?

그들: 혹시 서민교수님 아닌가요?

나: 네, 맞는데요. 근데 제가 온 줄 어떻게 아셨어요?

그들: 여기서 보기 힘든 빨간색 차가 돌아다닌다는 정보를 듣고 혹시 교수님 아닌가 했어요.



우리나라 공공기관이 제법 경비가 잘 되고 있다는 걸 확인해 기뻤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들은 날 데리고 간 뒤 음료수를 대접했고, 귤까지 몇 개 줬다.

그걸 먹으니 도저히 안되겠어서 화장실에 갈까 했지만,

갑자기 그분들이 이렇게 말한다.

“원장님께 인사드리러 가실까요?”

그래서 난 타이밍을 놓쳤고, 거기 갔다가 곧바로 강의장에 들어가야 했다.

그 상태로 1시간 반 가량의 강의+질의응답(질의응답이 유난히 많았다)을 견뎌냈는데,

강의가 끝나자마자 제일먼저 생각난 건 잽싸게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분들은 날 놔두지 않았다.

그들: 제가 지하철역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나: 괘,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그들: 부담 갖지 말고 타세요. 여기가 외진 곳이라 택시잡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난 지하철역까지 그분 차를 탔는데,

예상은 했지만 지하철역 화장실은 만원이었고, 세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 그냥 전철을 탔다.

벌써 4시간째, 이렇게 오래 참은 건 오랜만이었다. 

전철서 내리고 난 뒤 혹시나 싶어 화장실을 슥 봤더니 역시나 날 위한 자리는 없었기에,

근처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 척하면서 일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 화장실이 남녀공용인데다 여자 한분이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는 바람에, 그리고 계속 나오지 않는 바람에

난 할수없이 점심만 먹었는데,

식은땀이 나서 절반 정도만 먹고

황급히 나와야 했다.







결국 난 다음 목적지인 에x윌에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하도 참아서 그런지, 

일을 보고 나니 원래 하려던 일-학교 인터넷강의 녹화-을 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숱하게 NG를 냈다).

이날 일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우리나라 공공기관은 경비가 삼엄한 편이다.

2) 지나친 친절은 급한 사람에겐 안좋을 수 있다.

3) 에x윌은 공무원시험합격만 해주는 게 아니라 다른 좋은 일도 한다.

4) 좌파도 볼일에 한없이 약한, 인간의 한 종류다. 

저작자 표시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