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투표날
투표하기 싫은 날이었다.
독감에 걸려 끙끙 앓는 와중에도 택시를 타고 투표장에 갔던 내가
아픈 곳 하나 없는데도 코앞에 있는 투표장에 가기 싫었던 건 처음이었다.
이번 총선에선 새누리가 시중의 여론인 180석을 넘어 200석을 넘길 거라고 생각했고,
그리 생각하니 내 한표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적이 됐다.
그래서 난 암 투병중인 어머니가 “나 투표 안해도 괜찮냐?”고 하셨을 때 흔쾌히
“그럼요! 쉬셔야지요.”라고 대답했다.



일전에 중화드라마 ‘량아방’을 본 적이 있다.
한 천재적인 책사가 제대로 된 왕을 만들기 위해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왕자를 돕는 스토리인데,
중간쯤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가뭄과 메뚜기 떼로 인해 주민들이 굶어죽게 생긴 지역에 정부가 구호품을 보냈는데,
차기 왕권을 노리는 나쁜 왕자가 그 중 70%를 떼어먹고 30%만 주민들에게 전달한다.
터무니없는 구호품에 실망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나쁜 왕자는 군사를 몰고 가서 그 주민들을 제압한다.
왕은 그 왕자에게 구호품 전달을 잘 한 공과 반란군을 제압한 공에 대해 금은보화를 주며 치하한다.
그 대목을 보면서 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저렇게 당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건 지극히 당연한데, 왜 우리나라는 그러지 않는가?”


지금은 굳이 반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이 그냥 표로 성난 민심을 보여주면 되는 시대건만,
그 쉬운 일을 도대체 왜 하지 못하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살림에 펑크가 나고, 300여명이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목숨을 잃어도,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쳐도,
희한하게도 선거만 했다하면 새누리당은 압승을 했다.
그 중심에 있는 대통령에겐 ‘선거의 여왕’이란 타이틀이 붙었고,
대통령 주변 인사들은 누가 더 대통령하고 친한가를 놓고 싸우기 바빴다.
바쁜 현안들을 제쳐놓고 죽은 아버지를 미화하는 교과서를 만드는 걸 우선시하는 대통령의 오만은
아무리 삽질을 해도 지지율이 절반에 육박하고, 선거에서 매번 이기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전형적인 태도였다.
게다가 자신들을 견제할 야당도 지리멸렬한 탓에 오만은 점점 커져만 갔고,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여당의 공천파동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그런데 그 여당이 심판을 당하는, 믿기 어려운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난 뒤에도 반신반의했는데,
개표가 진행됨에 따라 그게 실제로 벌어진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국민들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알려준 의미있는 결과이긴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 같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번 선거에서 심판이 가능했던 건 다 안철수 대표 (이하 존칭생략) 덕분이다, 였다.


2. 안철수는 왜 새 당을 만들었을까?
다들 알다시피 안철수는 민주당을 나와 국민의 당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시각은 안철수가 괜한 트집을 잡아 분당을 했고,
그로 인해 야권 전체가 공멸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새누리가 개헌저지선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세간의 우려는 다 여기서 비롯됐다.

안철수가 이런 욕을 감수하고 분당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욱 교수가 쓴 명저 <아주 낯선 상식> (이하 상식)을 읽기 전까지,
나 역시 안철수의 분당이 대권욕에 사로잡힌 한 정치인의 과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의 책, 그리고 그 이후에 읽은 강준만 교수의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종교)을 읽고 난 뒤에야
그가 대권욕에 사로잡힌 건 맞지만, 그게 반드시 ‘과욕’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책에서 한결같이 말한 요지는 야당인 민주당이 친노패권주의에 빠진 나머지
호남의 민심을 오랫동안 외면해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동의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팟캐스트 파파이스를 진행하는 김어준도 소위 호남 홀대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나온 전남대 철학과 교수 박구용은 이렇게 말한다.
박구용: 호남은 문재인이 아쉬울 때만 와서 밥달라고 하는 자식이라고 생각해요.... 호남이 그렇게 지지해 줬는데 대선에서 졌다면 뭔가 책임을 지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박구용은 호남홀대론이 김어준의 말처럼 호남 출신에게 요직을 주지 않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좋은 정치를 해서 차기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못한 것에 호남인들이 실망한 것이라고 얘기를 하며,
“문재인이 호남에 와서 좀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남대 박구용 교수

하지만 김어준은 여기에 대해 시종일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갑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호남에서 수십 년간 살았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했재만,
난 박구용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내가 호남에서 수십년간 산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상식>과 <종교>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상식>을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 책에 달린 리뷰를 보면 “이런 건 호남이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는 것”이라는 식의 비판이 많던데,
그건 책의 메시지를 오해한 게 아닌가 싶다.
그 책에 나온 호남의 정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호남은 그간 죽어라 민주당에게만 투표해 왔다.
2) 지금 호남이 바라는 건 정권교체인데, 민주당은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다.
3) 호남은 민주당에게 경고를 보내고 싶다. 이정현 새누리 후보의 당선은 그 일환이다.
4) 하지만 그 후에도 민주당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좀 확실히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5) 그런데 호남은 80년 광주의 피해자인 탓에 죽어도 새누리당을 찍을 수는 없다.
6) 그때 마침 안철수가 새로운 당을 만들었다. 그래서 호남은 안철수 당에 몰표를 던짐으로써 민주당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걸 가지고 “어차피 국민의 당도 그놈이 그놈 아니냐”며 “호남은 여전히 지역주의에 갇혀 있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호남의 민심으로는 국민의 당이 아니라 그 어떤 당이라도 호남에 나오기만 하면
호남 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다.
“정의당이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는 있겠지만,
정의당은 광주에서 8개 중 4곳, 전남에선 10명 중 3곳에만 후보를 내는 데 그쳤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분당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좋게 말하면 안철수는 호남의 민심을 읽고 그걸 행동으로 옮긴 현명한 정치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당이 ‘호남 자민련’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민주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루어진 이번 투표방식이 차후의 선거에서 재현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다.




선거 전날 경향 기사. 난 왼쪽 위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3. 안철수로 인해 더민주가 이겼다
선거 직전까지 야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바랐다.
일부 지역에서 단일화가 성사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누리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노원병에 간 김무성 대표가 자당 이준석 후보 대신 “안철수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한 것은,
비록 그는 웃기려고 한 거였다고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자만에 빠져 있는지를 잘 보여준 광경이었다.



야당이 하나로 합쳐서 싸워도 질 게 뻔한데,
단일화마저 안 되자 야권 지지자들은 긴장했던 것 같다.
나처럼 자포자기한 유권자도 있었지만,
위기감을 느낀 일부 유권자가 투표장에 달려갔고,
그 작은 선택은 거대한 물줄기가 돼 새누리당과 청와대를 후려쳤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여소야대의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테니,
이게 다 안철수 덕분이다, 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오해하지 말자. 난 안철수를 지지할 마음은 없다).

그럼 이런 심판이 앞으로도 또 일어날 수 있을까.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승리해버린 야당이 앞으로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
박근혜 대통령 정도로 막가는 대통령이 여당에서 또 나올 가능성이 없다는 점 등이
이게 생애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심판’이 아닐까 싶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희망은 걸어보려고 한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온 다음 경구에 난 전적으로 동의하니까.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은 정말 명작이다...



* 그래도 결국 투표는 했습니다. 정의당 후보가 저희 동네에 안나와서 2번을 찍었고, 정당투표는 4번...(원래 3번이라고 써놨는데 제 착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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