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 6, 7차례 전화로 사고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도 받았다.”
그간 침묵하던 김장수 주중대사가 결정적인 진술을 했다.
그는 대통령이 평소 즐겨하던 서면보고 대신 전화통화를, 무려 6-7차례나 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김 대사는 오전과 오후에 걸쳐 통화하는 동안 대통령의 음성이나 음색에 변화가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변화가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또 세월호 참사에 대면 보고가 아닌 서면과 유선 보고를 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당시 청와대 상황실이 너무 복잡해 (대통령이) 와도 설명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2016-11-29 구자룡특파원 보도).]

그의 얘기를 듣고나니 대통령이 프로포폴에 취해 비몽사몽이었다는 세간의 의혹이 말끔히 사라진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청와대 상황실이 복잡해 대통령이 와봤자 방해만 되고,
설명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테니 그냥 관저에 계시라고 한 듯하다.
주군을 모시는 사무라이의 따뜻한 배려심이 느껴져 나까지 마음이 푸군해진다.

 

그래도 아쉽긴 하다.
그는 이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얘기하는 것일까?
이 사실을 진작 밝혔다면 7시간 의혹을 해명하느라 청와대가 진땀을 흘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그의 마음이 이해될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포와로를 보라.
사람들로 하여금 ‘도대체 누가 범인일까?’ 마음껏 잘못된 추리를 하게 한 뒤
짠 하고 나타나 “범인은 운전기사지롱!”이라고 밝힘으로써 존경을 받지 않는가.
그러니까 김장수는 포와로가 되기 위해 무려 2년6개월을 버티며,
굿을 했다느니 프로포폴을 맞았다는 등의 설들을 즐겼던 거다.

 

그의 해명 중 가장 놀라운 점은 대통령께서 “유리창을 깨서라도 구하라는 말은 들은 것 같다”는 대목이다.
갇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유리창을 아까워하지 말고 그냥 깨라는 것,
이건 보통 사람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놀라운 아이디어가 아닌가!
물론 깨진 유리창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재력이 있으니까 가능하겠지만,
그래서 김장수의 다음 말은 아쉽다.
[유리창을 깨서라도 구하라는 지시가 현장에 전달됐는지에 대해서는 “했다면 중대본(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으로 했을 텐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지시가 현장에 전달됐다면 갇혀있는 아이들을 상당수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김장수는 왜 이런 중요한 지시를 해경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까?
너무도 아쉬워 가슴 한구석이 아파온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유리창을 깨라는 얘기를 한 것으로 보아 대통령은 아이들이 갇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나본데,
오후 5시가 넘은 시각에 부은 얼굴로 중대본에 나타나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희대의 명언을 한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세심한 김장수는 여기에 대해서도 막힘없이 답변을 한다.
[김 대사는 “‘이노슨트 와이(innocent why)’ ‘순수하게 왜 그러냐’는 뜻으로 물은 것”이라고 답했다.]
이노슨트 와이, 이 말을 들으니 중학교 때 영어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기억을 더듬어 선생님의 말씀을 옮겨본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선진국에선 이노슨트 와이가 기본 덕목이야.
예를 들어 경찰이 실종된 남자를 찾고 있었다고 해봐.
그런데 한 경찰이 그 남자의 시체를 발견해 서장에게 신고해.
그럼 그 서장이 ‘시체 찾았으니 이제 수색은 중단해’라고 하면 그는 후진국 서장인 거야.
선진국 서장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
7시간 정도 더 수색을 하게 한 뒤 갑자기 현장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거지.
“남자가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
다른 경찰들은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지.
‘저, 아까 케빈 경관이 남자의 시체를 찾았잖아요. 서면보고도 몇차례 했는데...’같은 엉뚱한 소리나 해댈 거야.
그러면 서장이 이렇게 답하는 거야.
“나도 알아. 내 질문은, 이노슨트 와이야.”]
그러면서 영어선생은 덧붙였어.
우리나라에서 이노슨트 와이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된다고.
김장수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가 드디어 선진국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김장수는 세월호 사건 당시 국가안보실 실장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국가안보실은 정말 중요한 일을 했는데,
VIP에게 보고한답시고 영상을 빨리 보내라고 여러 차례 해경을 독려했다.
이쯤되면 나름 자기 할 일을 다한 것이지만
사고 자체가 워낙 크다보니 김장수는 억울하게 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그를 계속 야인으로 머물게 하지 않았고,
사표 후 일년도 안된 이듬해 3월, 그는 주중대사가 됐다.
이노슨트 와이를 이해하는 몇 안되는 한국인 중 하나인 그가
주중대사라는 자리에 간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가 주중대사로 간 뒤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아주 각별해 진 것도 그에게 감사할 일이지만,
바쁜 와중에 이렇게 대통령을 구하러 와준 것은 더 고맙다.
194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69세,
그가 더 오래도록 국가를 위해 일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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