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이 회충 한 마리씩 몸에 지니는 게 예의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변을 볼 때 회충이 나오는 일은 그리 특별한 게 아니었고, 그게 입으로 기어 나와도 조금 놀라는 정도였단다. 서울의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의과대학에 기생충학과가 만들어진 건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기생충학의 태동은 학문연구보다는 당시 시급한 과제였던 전 국민 기생충 감염률을 낮추는 게 목표였다.

정부와 기생충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기생충은 서서히 박멸되기 시작했다. 1971년 84%에 달하던 기생충 감염률은 점점 떨어져 1990년대 초 선진국 수준인 3%대에 진입했고, 그 뒤로도 꾸준히 3%대의 감염률을 유지하고 있다.
당면과제가 해결되자 기생충학자들은 기생충을 이용해 인류의 건강증진에 기여하는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부산대 유학선 교수는 기생충을 이용해 알레르기를 줄이는 연구로 유명 외국 학술지에 여러 차례 논문을 실었고, 충북의대 엄기선 교수는 아시아조충의 생활사를 최초로 밝혀 세계적 권위의 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생충학과=기생충 치료’라는 등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생충도 없는데 대체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니?”라고 묻기 시작했다. 기생충학과는 졸지에 존폐위기에 몰렸고, 교수를 새로 뽑아달라는 요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의대를 졸업하는 학생들 중 기생충학을 선택하는 이가 없다는 것. 학문의 발전이란 젊고 똑똑한 후배가 들어와야 가능한 법인데, 내가 입문한 1992년 이래 20년이 다 되도록 의대 졸업생 중 기생충학에 남은 이는 두 명에 불과했다. 장래가 불투명한 과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싶지 않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리라.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생충학과도 변신의 노력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첨단적인 연구를 한다 해도 ‘기생충’이라는 말이 낡고 더러운 이미지를 풍기니, 그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대두됐다. 

연세대와 중앙대, 그리고 한양대는 우리 환경에 존재하는 의학적 관심이 필요한 생물이란 뜻의 ‘환경의생물학과’로 이름을 바꿨고, 건국대는 ‘환경생물의학교실’이 됐다. 

하지만 과 이름이 바뀐다고 다루는 대상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걸 모두가 알고 있는지라 해당과에 의대 졸업생이 지원하는 일은 여전히 없었고, 학교 측에서 교수를 뽑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기생충학 교수가 정년퇴임을 해 자리가 비어도 새로운 교수가 충원되지 않는 게 작금의 현실이니, 앞으로 20년만 지나면 기생충학이란 학문은 이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1997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외환위기, 즉 국제통화기금(IMF)에 돈을 꿔서 국가부도를 막아야 하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했다. 경제파탄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은 당장 닥친 대통령선거가 걱정된 나머지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꿨고,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은 TV토론에서 경제파탄의 책임공방이 일자 “외환위기를 가져온 건 신한국당이고 한나라당은 무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의 이름을 바꾼다고 국민들이 속아 넘어갈 리는 만무했는지라, 그해 대선에선 우리나라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일어난다.

경향신문DB/김용민의 그림마당

 

그랬던 한나라당이 최근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 당 중진들의 비리가 날이면 날마다 터져 나오니 이런 상태로는 4월 총선과 올해 말 치러지는 대선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판단을 한 탓이다. ‘새’는 ‘하늘을 나는 짐승’이고 ‘누리’는 ‘세상’을 지칭하니 새들의 세상을 만들겠단 뜻인가 본데, 국민들보다 새를 더 우선시하려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비리로 점철된 당의 본 모습이 가려지진 않을 것 같다. 궁금하다. 기생충학과 새누리당 중 누가 먼저 없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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