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에 올라온 지 얼마 안된 어느날,
담임선생님은 우리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군것질은 나쁩니다. 몸에도 좋지 않고요.
우리 매점에서 파는 햄버거, 그거 200원에 팔죠?
집에서 만들면 훨씬 더 싸고 맛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우리 반 학생들 중 군것질을 하다 걸리면 벌금 200원을 걷겠습니다.
그 벌금은 모아뒀다가 우리 학급을 위해 좋은 일에 쓸 테니,
군것질 하는 학생을 보면 저한테 신고해 주십시오."

 

매점에서 파는 햄버거는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였다.
돈이 없어서 못먹을지언정 먹는 이에게는 천상의 맛을 제공했는데,
그 뒤로 수십년을 더 살았지만, 그보다 더 맛있는 햄버거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중2, 한창 식욕이 뻗칠 우리에게 그 햄버거는 그림의 떡이 됐다.
해당 조치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된 종례시간,
선생님은 학생 두명을 앞으로 나오게 한 뒤 군것질 한 것을 자백하라고 했다.
그들이 벌금을 내는 광경을 본 학생들은 군것질을 자제했고, 

쉬는 시간마다 다른 반 아이들이 햄버거를 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9월의 어느 날, 나랑 어울리던 친구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민아, 햄버거 먹고 싶지 않니?"
그의 작전은 단순했다.
1) 쉬는 시간에 가장 먼저 뛰어나가 햄버거를 산다.
2) 햄버거를 들고 뛴다.
3) 애들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서 햄버거를 먹는다.
용돈이 후했던 그 친구는 정말 잽싸게 햄버거를 샀고,
우리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뛰는 와중에 그는 햄버거의 반을 갈라서 나한테 줬고,
한적한 곳까지 갈 만큼 인내심이 없었던 우리는
뛰는 와중에 그 햄버거를 다 먹어치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맛은, 천상의 맛 그 자체였고,
난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종례시간에 그 친구와 난 앞으로 나가 우리의 죄를 자백했고,
벌금 200원씩을 납부했다.

나이가 든 지금은 그 선생이 왜 그런 조치를 내렸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같았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발했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선생이 그런다고 다른 친구를 밀고하는 우리 반 학생들이었다.
신고한다고 해서 뭐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 조치 자체가 공익을 위한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신고하려고 혈안이 됐을까.
별다른 낙이 없던 중학교 시절 가운데 중2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느꼈던 건
부당한 체제에 부역한 동료들 때문이었으리라.

 

2016년 12월, 서울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17명은
이듬해 2월에 퇴임하는 교수에게 골프채를 선물했다.
퇴임 교수에게 후배 교수들이 선물을 하는 건 학계의 관행이었고,
이를 위해 그들은 1인당 40만원을 각출한다.
그 정도면 내는 사람이 부담을 별로 느끼지 않을 액수였으리라.
하지만 이 사실을 안 병원 관계자는
이들이 청탁금지법 (소위 김영란법)을 위반했다고 국민권익위에 신고했다.
권익위는 이 신고가 사실임을 확인한 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여기에 더해 권익위는 신고자가 김영란법 정착에 기여했고,
공직자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점을 들어 150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한다.

 

김영란법의 취지는 공직자가 뇌물을 받고 편의를 봐주는 행위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김영란법 이후 뇌물에 대해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니,
이것만으로도 법이 만들어진 건 잘된 일이다.
하지만 권익위의 법 적용이 너무 기계적이라는 점은 아쉽다.
퇴임교수에게 선물을 한 것이 도대체 후배 교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줬을까?
권익위는, 해당 교수가 완전히 퇴임한 후 선물을 받으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한두달 더 기다렸다 선물을 받으면 그게 수천만원, 수억원이라 해도 아무 상관이 없고,

그 전이면 안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실효성이 있는지 난 알지 못한다.

게다가 제약회사의 손목을 비틀어 골프채를 마련했다면 모를까,
개인이 각출해서 주는 선물마저 법의 잣대로 단죄하려는 권익위의 태도는
김영란법의 취지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이 사건을 기사로 접한 뒤 난 중2 때의 일을 떠올렸다.
매우 부당한 체제로 인해 구성원들이 피해를 보고,
또 그 체제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는 이가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나빠진 것도 있으니,
신고자가 몇 달치 월급에 해당되는, 1500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크게 봐서 직장동료였던 그가
어떤 마음으로 신고를 했는지 난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퇴임하는 선배에게 후배들이 주는 순수한 선물을 신고하는 건
뇌물을 주는 행위보다 더 나빠 보인다.
이런 이에게 '경각심' 운운하면서 거액의 포상금을 주는 권익위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 걸까?
북한에서 존재한다던 5호담당제처럼,
좋은 마음으로 주는 카네이션이나 캔커피 한 병을 신고하기 위해 눈을 부라리는 세상이
김영란법이 꿈꾸는 세상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란법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이 법의 적용대상이 공무원과 교수, 언론인 등
전체 인구의 10% 미만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김영란법은 퇴임하는 회사 상사를 위해 금송아지를 선물한다든지,
하청업체가 명절 때 원청 직원에게 백만원짜리 상품권을 선물한다든지 하는 식의
정말 원하지 않는 선물이 오가는 것은 수수방관한다.
퇴임하는 선배에게 주는 골프채보단 이런 것들이 훨씬 더 뇌물에 가까운데 말이다.
시행 3년째, 이젠 김영란법에서 불합리한 것들을 손질했으면 한다.
그래야 이 법이 더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까.

 

* 후배교수 17명에 대해 검찰은 관행이라며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지만,

당사자들이 조사를 받고 이게 기사화되는 것은 처벌받은 것과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다.

 

** 이런 글을 쓰면 "네가 혜택 못받으니까 그렇지!"라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난 법 이전에도 누구에게 얻어먹고 산 적이 없고,
퇴임 때 선물 같은 거 해줄 후배도 없다는 점 밝혀둔다. (우리과에 나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