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독서

 

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놀 만한 게 별로 없었던 옛날에는 할 일이 없어서라도 책을 읽곤 했는데,

지금은 <울랄라부부>도 봐야하고, 인터넷도 해야 하니 책이 들어설 자리는 점점 없어진다.

그나마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가 책을 읽는 좋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마저 스마트폰에 잠식당한 느낌이다.

놀만한 것들이 널려 있는 마당에 책을 꼭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럴 필요 없다"고 답하련다.

책을 읽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대개가 책을 썼거나 향후 책을 낼 계획이 있는 사람들로,

어찌보면 자기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꼭 읽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정치인이다.

정치라는 건 이권의 배분이고, 그런 엄청난 일을 위해선 소위 철학이란 게 필요하다.

물론 철학이란 게 꼭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방끈이 그리 길지 않으신 시골 할머니들의 말씀을 듣다보면

"이분이 혹시 세상을 통달한 게 아닌가?"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분들은 삶을 온몸으로 살아 내신 분들이고,

책이 기껏해야 간접경험을 선사하는 반면

직접 몸으로 겪은 경험들은 더 큰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책을 백날 읽은들 한번 사랑에 빠져보는 게,

사랑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그럼에도 정치인들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정치라는 건 대개 그 사회의 엘리트들이 하며,

그분들의 삶은 우리가 겪어내는 그런 삶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책마저 읽지 않는다면

보통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 알 기회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책을 읽으면 글은 물론이고 정치인의 필수 품목인 말도 더 잘하게 된다.

하루 다섯시간 독서법을 십년간 했다는 처칠을 비롯해서

멋진 말을 남긴 정치가들은 다 소문난 독서가였다.

 

 

박근혜를 보면서 참 의아했다.

어쩜 저리도 생각이 짧으실까 싶어서였다.

예컨대 자기 측근에 대해 비리의혹이 제기되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물어봤더니 아니라더라. 그럼 아닌 거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잘 해야 한다"거나 "잘 되도록 해야 한다" 식의 허무개그로 듣는 이를 허탈하게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정준길의 안철수 불출마 협박에 대해 박근혜는 “서로 오랜 친구로 개인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그런 걸 이렇게까지 확대해석하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 했다.

그녀한텐 정준길이 금태섭과 친구라는 것, 그리고 친구끼린 싸워서 안된다는 것만 중요할 뿐 정준길의 자신의 공보위원이란 건 아예 생각을 안하고 있다.

 

 

 

2) 인혁당 사건에 대해 묻자 "대법원 판결이 두 개로 나오지 않았느냐...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첫번째 판결이 잘못되어 다시 재판을 한 거니 후자의 판단을 존중하는 게 보통 사람의 상식이지만, 박근혜는 그 둘이 같은 무게를 지닌다고 본다.

3) 올케의 저축은행 관련 의혹에 대해서 물었을 때 "검찰이 문제 될 게 없다고 했다."<---대선후보라면 '앞으로 이런 의혹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라고 했어야 한다.

4) 박근혜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새누리당에서 쇄신요구가 나왔는데, 이에 대한 박근혜의 대답,. "당에서 항상 다양한 의견이 있지 않느냐...지금은 내일모레가 선거이기 때문에 힘을 모아서 선거를 잘…”<----새누리당에서 간만에 나온 쇄신안이고, 그게 자신의 대선가도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건만, 박근혜는 그게 자기를 비난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제대로 된 후보라면 "그분들의 요구에 깊이 공감한다. 나부터 반성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몇 개만 봐도 중학생이 답변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중학생 분들게 죄송!)

왜 이럴까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우리는 지난 총선 때 잘린 전여옥 씨의 발언에 맞닿게 된다.

[전여옥 의원인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평가하며 “좋은 지도자는 지적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박 위원장은) 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15일 저녁 CBS 라디오 ‘정광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해 “박 위원장은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며 “자택의 서재에 가보니 책이 일단 별로 없고 증정 받은 책들로 통일성도 없었다. 그래서 여기가 서재인가라는 생각을 들었었다”고 밝혔다.]

그랬다.

박근혜가 저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책을 읽지 않아서였다.

가방끈이 짧은 시골 할머니처럼 삶을 온몸으로 살아냈다면 책의 도움 없이도 나름의 경지에 올랐겠지만,

박근혜는 그렇게 하는 대신 집안에 들어앉아 남과 격리된 채 학처럼 고고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박근혜에겐 무슨 철학이란 게 들어설 여지가 없었고,

답변을 거부하거나 아주 짧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독서가로 소문난 김제동이 심금을 울리는 말들로 구성된 어록을 갖고 있는 반면

소위 박근혜 어록이 허무개그로 점철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물론 머리야 빌리면 되고,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생각이 있어야 행동이 있는 법이고,

어떤 머리를 빌릴지 결정하기 위해선 나름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참모들이 있어도 박근혜가 그다지 잘할 것 같지 않은 건 이런 이유다.

 

물론 박근혜 후보가 생각이 좀 짧아서 그렇지, 나름 장점이 많다.

예를 들어 한결같은 헤어스타일과 움직이지 않고 오래 앉아 있는 능력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문재인. 안철수와 더불어 '누가 더 오래 가부좌로 버티나' 시합을 한다면

난 전 재산을 박근혜에게 걸 것이다.

아쉽게도 이런 것들이 스님들의 덕목일 뿐 대통령이 가져야 할 게 아니라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오랜 기간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이유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가 점점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읽지 않으면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없고,

책을 읽지 않으면 좋은 정치인을 식별할 수 없으니까.

 

* 덧붙이는 의혹 하나. 박근혜는 책을 안읽었으니 그랬다 치고, 책 좀 읽었다는 전여옥씨, 당신은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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