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F를 주지 않는다.

잘 가르친 후에 시험을 잘 볼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게 내 가치관인데,

내 강의 자체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그런 내가 딱 한번 F를 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기말고사에 결시를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난 무슨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심지어 "전날 공부를 새벽까지 하다 그만 늦잠을 잤다"라고 해도

얼마든지 재시험의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 시간 쯤 후 그 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시험을 못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기에 안본 이유를 물었다.

그 학생의 대답은 이랬다.

"어제 과음했는데요."

미안한 기색은 찾을 수 없는, 너무도 명랑한 목소리였다.

휴대폰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고,

난 알았다고 짧게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난 성적 입력란에 F를 표기했다.

다른 단과대와는 달리 의대는 한 과목이라도 F가 있으면 학년 진급이 안 되는지라

그 학생은 말 한마디 때문에 1년간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시 본과 1학년을 다녀야 했다.

 

 

 

대선 레이스를 경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대통령 선거를 수능시험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삶에서 수능시험이 중요한 것처럼,

각 대선후보들에게 12월 19일의 대선은 수능만큼의 가치를 지닌 중요한 시험이 아니겠는가?

그 경우 사람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하고, 참모들과 정책연구를 하는 건 시험공부에 해당되고

기자회견과 앞으로 있을 토론회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비유할 수 있겠다.

학생들이 모의고사를 통해 자신의 전국석차를 알듯,

후보들은 시시때때로 시행되는 여론조사를 통해 자신의 성적표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마련이다.

박근혜 학생, 아니 후보는 평소 공부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줄곧 1등을 차지했다.

무시무시한 찍기 실력을 갖고 있다는 설, 선생님들이 편애를 해서 그렇다는 설 등이 난무했지만

비결은 그녀가 가진 수첩에 있었다.

사물의 온갖 이치가 적혀 있다는 그 수첩을 가지고 시험에 들어간 덕분에

그녀는 늘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수첩을 이용해 늘 1등을 하는 그녀를 사람들은 ‘수첩공주’라 부르며 존경했다.

 

 

그래서 그런지 박근혜 후보는 자만에 빠졌고,

점점 더 공부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그의 취약과목은 자기 아버지가 강탈했다고 알려진 정수장학회.

정수장학회가 대선 필수과목이니만큼 연말에 1등을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 확실히 공부를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모든 시험에 수첩을 갖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하지만 그는 그 과목을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선생님들의 질문에도 짜증을 부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10월 22일에 있은 기자회견은 그 결정판이었다.

그간 논란이 됐던 정수장학회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기에

최소한 기존에 나왔던 시험문제-소위 족보-는 한번쯤 훑어보고 임했어야 했다.

“법원에서 강압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원고패소 판결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교과서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1)강압이 있었음은 인정된다.

2)헌납을 무효로 볼 증거는 불충분하나 (의식은 멀쩡했으니까) 강압에 의한 증여이므로 취소할 수 있다.

3) 취소권은 10년 내에 행사해야 하는데 그걸 안했으니 72년에 소멸하였다.

그런데도 강압이 없었다고 하다니, 맨날 시험에 나오는 내용을 어떻게 틀릴 수가 있을까?

기본적인 문제도 풀지 못하자 보좌진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기자회견 도중 그게 아니라는 메모를 전달했지만

수첩에 적힌 게 아니면 해독하지 못하는 우리의 박근혜는 그대로 기자회견을 마친다.

보좌진은 이해력이 떨어지는 그녀에게 차근차근 설명했고,

결국 박근혜는 다시 단상에 올라 다시금 수첩을 읽었다.

“제가 강압이 없었다 했습니까. 잘못 말한 것 같아서... 강압이 있었는지 인정하기 어렵다 해서 패소 판결 한 걸로 알고 있고요. 우리 기자분들 더 잘 알고 있죠? 강압에 의해 주식 증여 인정된다고 강박의 정도가 김씨 스스로 박탈할 만큼 무효로 할 정도로 인정되지 않는다...없다고 말 한 것은 잘못 말한 것 같다”

이 광경을 보면서 난 과음해서 시험을 못봤다는 그 학생의 말을 들었을 때처럼

손이 부르르 떨렸다.

박근혜 학생도 기자회견 전날 과음이라도 한 걸까?

 

 

 

게다가 박근혜는 무슨 해적판 교과서를 참조했는지

정수장학회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무시하고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독창적인 견해를 펴기까지 했다 (조선출판사에서 나온 걸 봤나?)

이런 분이 내 학생이었다면 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F를 줬을 거다.

대선후보들이 학생이라면 우리 유권자들은 대선 때 시험지를 채점하고 성적을 매기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다.

지금까지 박근혜가 여러 시험에서 1등을 한 건,

많은 이가 박근혜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F 대신 A+을 준 탓이고,

그건 시험성적을 객관적으로 하기보단 기타 다른 이유-빨간 건 싫어요 등등- 때문에 제대로 판단을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제라도 박근혜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가 과연 A+를 받는 게 온당한지, 그래서 1등을 하는 게 우리나라를 위해서 바람직한 건지,

아니면 내 생각처럼 F를 받아 마땅한 것인지를.

박근혜에게도 이번 대선이 중요하겠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앞으로의 5년은 훨씬 더 중요하니까.

 

 

 

커닝은 자랑이 아니므니다 -마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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