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만 보는 재인

 

1996년 2월, 난 군입대를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거기서 3주간 훈련을 하면서 군대에 보낼 사람을 선별한 후

군에서 필요한 사람은 영천으로, 공중보건의로 갈 사람은 성남으로 보내는 시스템이었다.

나처럼 기생충학을 한 사람을 군대에서 필요로 할 리가 없는지라

보나마나 공보의로 가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내무반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서로 친해졌고, 3주 훈련을 마칠 때쯤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정도가 됐다.

예상대로 우리는 모두 공보의가 됐고, 군대기차를 타고 용산으로 갔다가

거기서 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가기로 했다.

 

군대기차라는 게 타본 분은 아시겠지만 걷는 것과 속도가 비슷해,

대구에서 용산까지 가는 게 거의 10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을 하다가 우리끼리 조촐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발이 빠른 내가 대표로 선정됐고, 난 교관의 눈을 피해 가게에 들러 술과 안주를 좀 샀다.

그때 든 돈이 대략 5만원 정도였는데, 그게 내가 가진 돈의 거의 전부였다.

내무반 사람들은 말했다. 성남에 가서 돈을 주겠다고, 일단은 좀 마시자고.

가는 동안 우리는 정말 재미있게 파티를 했는데,

군대에서, 교관 눈을 피해가며 마시는 술은 정말 맛있었다.

 

 

문제는 성남에 도착한 이후였다.

같은 내무반을 쓸 줄 알았던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바람에 난 돈도 없이 모진 훈련-우리 딴에 그렇단 얘기다-을 이겨내야 했다.

새 내무반 사람들이 매점에 가자고 할 때마다 난 먹고싶지 않다고 거절했고,

그 대신 그다지 맛이 없는 군대 밥을 무지무지 많이 먹었다.

안되겠다 싶어 집에다 편지를 썼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저 돈 좀 보내 주시면 안될까요? 3만원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뒤부터 난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의 답장을 기다렸다.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시는 어머님이니, 총알같이 돈을 보내주시겠지,라며.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돈은 오지 않았는데

수돗가에서 만난 옛 동료가 5천원을 줬기에 숨통이 트이긴 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특별 외박을 나갔을 때

난 간만에 만난 어머니에게 내가 보낸 편지를 못받았냐고 따졌다.

“편지? 못받았는데?”

그랬다. 편지는 전달이 안된 거였다.

주소를 잘못 썼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군대에서 검열하면서 편지를 누락시킨 듯했다.

그것도 모르고 난 “우리 어머니가 틀림없이 돈을 보내 주실 거야”만 믿고

편지를 나눠줄 때마다 귀를 쫑긋 세웠던 거다.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지 말고 각 내무반을 돌면서 옛 내무반 사람들을 찾을 것을.

돈을 빌리는 것도 아니고, 그때 내가 미리 쓴 돈을 받는 거니

그렇게 한다고 창피할 일은 아니었다.

 

후보등록을 앞두고 “단일화는 하는 거냐”로 사람들의 마음이 초조해졌을 때,

안철수 후보는 기자회견과 함께 후보직을 사퇴했다.

단일화 없이 선거를 치룰 경우엔 패배가 100% 확실했으니,

안철수의 사퇴는 어찌되었건 야권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해 준 거였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멋있는 이슈를 내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건만,

문재인 후보는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안철수의 지원 뿐,

안철수가 무슨 말만 하면 “우리를 지지해달라는 말씀이다”라고 억지해석을 하질 않나,

엊그제도 안철수의 집에 찾아갔다가 만나지도 못했단다.

 

마음이 아프다.

제1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밑에 의원 하나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한 무소속 후보의 도움 없이는 선거를 치르지 못하겠다는 것이.

이대로 간다면 안철수가 사퇴하면서 문재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게,

추후 문재인을 지원하지 않은 게 대선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될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안철수가 지원유세를 해줬으면 하고 바라지만,

안철수가 후보직을 사퇴한 것만으로도 안철수는 자기 역할을 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자기를 찍게 만드는 건 문재인 자신의 몫이다.

안철수 지지자들이 장기판의 졸이 아닌 바,

안철수가 나와서 문재인 손 한번 들어준다고 그 표가 모두 문재인에게 오는 건 아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려 할 때 도움의 손길이 찾아온다.

자기 나름의 이슈를 선점하고,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고 유권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

그런 걸 하지 않고 안철수만 바라보는 지금의 문재인을 누가 지지하겠는가?

 

1996년, 어머니의 돈은 끝내 오지 않았다.

2012년, 안철수는 문재인의 기다림에 부응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안철수가 지원을 했는데 졌다간 박근혜에 의해 안랩이 폭격을 맞을까봐 걱정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문재인이 계속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안철수가 아무리 지원유세에 나선들, 18대 대통령은 박근혜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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