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과 박근혜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20년 전만 해도 스파이물 하면 다들 ‘007 시리즈’를 떠올렸다. 1962년 처음 만들어진 후 20편이 제작된 007 시리즈는 어렵고 고독한 직업일 스파이에 대해 그릇된 환상을 품게 만들었다. 미끈하게 잘생긴 얼굴에 고급양복을 입고 미녀들을 마음껏 유혹하는 스파이라니, 한번쯤 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시리즈마다 황당한 설정이 반복되자 팬들은 점점 식상감을 느꼈다. 게다가 강력한 적이던 소련이 해체된 탓에 007이 왜 필요한지조차 의문시됐고, 이런 회의감은 흥행의 보증수표였던 007 영화에 관객이 발길을 끊는 것으로 이어졌다.



(경향신문DB)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게 1996년부터 시작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다. 세계 제일의 미남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이 시리즈는 몸을 사리지 않는 주인공의 연기가 볼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1편에서 주인공이 줄 하나에 매달려 CIA에 침투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작년 말 개봉한 4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828m짜리 빌딩에 대역도 없이 올라갔는데, 빌딩 벽에서 줄 하나에 매달려 작전을 수행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첨단 무기와 정예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긴 해도, 그의 대담한 액션에 사람들이 열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2002년부터는 <본 아이덴티티>를 필두로 소위 ‘본 시리즈’가 만들어진다. 최첨단 무기나 미녀들이 등장하지 않는 게 특징인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제이슨 본은 고급차 대신 기차나 지하철을 타고, 잠도 허름한 모텔에서 혼자 잔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주먹이며, 가끔씩 쓰는 폭탄도 전자레인지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조합해서 만드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에게 열광했고, 비현실적이기만 한 007 시리즈를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됐다. 위기감을 느낀 007 제작사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느끼한 미남 배우 대신 터프한 이미지의 다니엘 크레이그를 제임스 본드로 낙점했고, 최첨단 무기보다는 주먹을 쓰고 몸을 날리는 액션에 더 비중을 뒀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007은 다시금 부활했고, 최근에는 크레이그가 주연한 세 번째 시리즈물 <007 스카이폴>이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007이 스파이물의 대명사였던 것처럼, 박근혜는 지난 4년간 줄곧 차기 대통령 1순위로 꼽혀왔다. 그래서였을까? 자만심에 빠진 그녀는 국민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신비주의 콘셉트로 일관했고, 어쩌다 하는 언론 인터뷰에선 황당한 상황이 자주 연출됐다. MBC 파업에 대한 의견을 묻자 “노사가 슬기롭게 대화로 풀었으면 좋겠다”는 하나마나한 답변을 하고,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고 한 바 있다. 두 번째 판결이 과거의 판결이 잘못됐음을 인정한 것이라는 상식은 그녀에게 없었다. 심지어 정수장학회 관련 기자회견에서는 법원의 판결문조차 읽어보지 않았는지 “강압은 없었다”고 해 나중에 정정발언을 해야 했다.



국민들은 점차 그녀의 무성의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답변들에 지쳐 갔는데, 그 틈을 비집고 나온 사람이 바로 안철수였다. 기성 정치권에 물들지 않은 신선함을 바탕으로 등장한 그는 서울시장 후보를 통 크게 양보하면서 여론조사 사상 처음으로 양자대결에서 박근혜 후보에 앞서는 후보가 됐다. 이어 문재인이 등장했다. 민주당 경선 내내 1등을 차지하며 제1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그는 파격적이진 않지만 꾸준한 모습으로 점점 지지율을 올리고 있다. 거듭된 흥행실패로 위기에 몰린 007 시리즈는 기존 본드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다니엘 크레이그를 기용하며 부활의 계기를 만들었다. 역시 지지율 저하로 위기에 빠진 박근혜는 DJ 측 인사들인 한광옥과 김경재 등을 영입한 데 이어 며칠 전에는 철새 정치인의 대명사인 이인제 의원을 받아들였다. 과연 이들이 박근혜에게 다니엘 크레이그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고 나니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한광옥부위원장과 악수하는 박근혜 후보 (경향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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