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눈물

 

23일 오후 820분경, 난 내가 사는 아파트 회의실에 있었다.

아파트가 도로와 면한 곳에 설치될 방음벽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함이었다.

문제가 발생한 건 내가 이사오기 전부터였으니, 1년도 훨씬 지난 얘기다.

간단히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원래 건설사 쪽에서 만들어 주기로 한 방음벽은 흡음기능도 뛰어나고

재질도 투명해 시야에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게 어느 순간부터 불투명하고 높이도 낮을 뿐 아니라 흡음기능도 떨어지는,

한마디로 저질의 방음벽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입주자 대표회의(이하 입대의)는 주민들의 의사도 전혀 묻지 않고 일을 진행했단다.

 

 

당연히 주민들은 입대의를 불신하기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입대의 측은 방음벽 말고도 엘리베이터 관리업체를 선정하는 일,

아파트 광장에 나무를 심는 일 등에서도 석연치 않은 행동을 한 게 드러났다.

주민들 돈으로 자기 장모 喪에 50만원을 지급했다는 주장도 제기됐으니,

이런 입대의를 어떻게 믿겠는가?

회의 때마다 고성이 오가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이어졌고,

회장과 주민들간에 이루어진 고소고발도 한두 건이 아니다.

주민들은 입대의, 특히 회장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회장은 절대로 물러날 수 없다며 버텼다.

입대의 회장은 원래 주민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자리고,

자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희생을 강요당하는 그런 자리다.

그렇다고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다 조금 잘못하면 욕만 먹게 마련인데,

1년이 넘게 욕을 먹으면서도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대체 뭘까?

주민들은 혹시 입대의 핵심간부들이 건설사로부터 돈을 받고

저질 방음벽을 묵인해 준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인근 아파트에서 입대의 간부들이 1억원의 돈을 받은 게 탄로난 걸로 보아,

그럴 개연성도 충분히 있다.

어제 열린 회의에서도 회장은

업체에서 돈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살만한 발언을 여러 차례 해서 주민들의 야유를 받았다.

그 밑에 있는 간부들이 물러나겠다며 사의를 표명하는 와중에도 회장은 끝까지 버티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박근혜의 멘붕

 

 

 

내가 입대의 회의를 참관하고 있는 동안,

안철수 후보가 놀라운 선언을 했다.

대통령후보를 사퇴하고 백의종군을 하겠단다.

난항을 거듭하는 단일화 과정을 즐겁게 바라보던 새누리당 관계자들에게도,

단일화가 물건너가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던 사람들에게도

안철수의 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오죽하면 경향신문 1면 제목이 , 안철수).

한때 지지율 1위를 달리기도 했고,

단일화가 됐을 때 박근혜 후보와의 대결에서 더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터였기에

더더욱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재인 후보의 손을 들어주며 후보를 사퇴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안철수 후보의 행동은 기존의 정치권에서 보기 힘든 아름다운 것이었다.

1987년 김영삼-김대중이 치고받고 싸우다 노태우를 당선시킨 쓰라린 기억이랄지,

단일화의 조건으로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절반을 요구하다 대선 전날 불복선언을 한 정몽준 후보의 예를 상기해 봐도,

문재인 후보에게 성원을 보내달라며 아무 조건없이 백의종군을 선언한 안철수의 행동은 찬란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어떤 선거든지 후보 사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선거에 나서기 전부터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며,

돈을 내거나 이런저런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대부분은 순수한 마음으로 후원을 했겠지만, 걔중에는 당선이 되고 난 뒤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람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후보사퇴는, 이런 다양한 지지자들의 허탈감과 분노를 감당해야 하며,

혹시 내가 계속 완주했다면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개인적인 아쉬움을 평생 지고 가야 할,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지방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 회장도 그 쥐꼬리만한 권력을 지키려 애쓰는 판국에,

대통령이 눈앞에 보이는데 기꺼이 후보를 사퇴하는 그런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물론 안철수의 후보 사퇴가 꼭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란 보장은 없다.

박근혜의 지지표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데 비해

안철수 지지표가 모두 문재인에게 가는 게 아니어서다.

그래도 안철수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냈다.

남은 것은 문재인 후보와 우리의 몫이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한 명분이 정권교체를 위해서였다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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