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은 캠브리지 석좌교수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이다.

그의 전작 <온도계의 철학>은 내가 읽기에 좀 버거웠지만,

이 책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어 술술 읽힌다 (EBS 강연을 모은 것이라 구어체로 돼있다)

그럼에도 내용에 깊이가 있어서 읽을수록 머리가 가득 차는 뿌듯함도 선사하는데,

이 책에서 감명깊었던 내용은 우리의 감각이 이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구절이었다.

'관측이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 이론을 과학철학에선  '관측의 이론적재성'이라 부르는데,

장교수는 이런 예를 들었다.

한쪽 눈을 감으면 자기 코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코는 늘 우리 시야에 노출돼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보이면 유용하지도 않고 걸리적거리니까 뇌에서 알아서 편집해서

우리 의식에는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63쪽)



400여년 전,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다.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존재는 지동설이 맞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데,

동료 교수들에게 보여주니 다들 "망원경에 묻은 때다" "수증기를 잘못 본 것" 등등의 말을 하면서

과학적 진실을 외면했다.

천동설에 경도된 그들의 눈엔 자신의 믿음을 위협할 수 있는 과학적 발견이 보이지 않았고,

이는 감각이 이론에 지배된다는 또다른 예다.





그보다 더 생생한 예는 다음일 것이다.

서울시장 박원순씨의 아들은 허리가 안좋아 공익 판정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의혹이 제기됐고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박씨의 아들은 2012년 세브란스병원에서 2명의 입회하에 MRI를 찍었다.

그 결과 적법한 사유에 의해 공익판정을 받은 것이 확인됐는데,

그렇다면 의혹이 일단락돼야 마땅하지만,  놀랍게도 박씨 아들의 병역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처음 그 사실을 주장한 사람은 현직 영상의학과 교수인 양승오씨.

그는 "MRI가 바꿔치기당했다"라고 주장했는데,

거기에 대해 영상의학과에 근무하는 내 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MRI는 필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디지털로 영상이 나와서

찍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다 뜨거든요.

그런데도 바꿔치기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한 인간의 믿음이 진실을 제대로 보는 걸 방해하는 것 같아요."





박씨의 정치적 반대자들에겐 그 교수의 말이 구원의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렇게 주장한다.

"아들 불러서 다시 찍으면 간단할 텐데, 안찍으려 하는 걸 보면 뭔가 의혹이 있다."

"국민적 의혹이 있다면 100번이고 찍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럴 듯한 말로 들리지만, 실상은 다르다.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MRI를 눈앞에서 바꿔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수백번을 찍어도 추가적인 의혹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타블로의 학력에 대해 지속적인 의문을 제기했던 '타진요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타블로는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나름대로 증거를 제시하지만,

그럴수록 타진요는 더 큰 의혹을 들고나왔다.

타블로가 내미는 증거들이 다 조작이라고 믿다보니

어떤 증거를 내놓아도 의혹해소가 불가능할수밖에.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한 방송사에서 스탠포드에 가서 직접 모든 것을 확인했고, 여기에 대해 방송이 나간 뒤

타진요는 소리소문도 없이 해체됐다.

타블로에게 "당당하게 증거를 내놓으라"던 타진요 측은 그 뒤 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도주하는 모습을 보여 빈축을 샀다.

장하석 교수의 말대로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하며, 자신의 신념은 그 불완전함을 증폭시킨다.

바꿔치기같은 추정 말고 보다 확실한 증거를 내놓든지,

그럴 능력이 없다면 박씨 아들은 이제 그만 좀 괴롭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