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 비겁했다



서울에 일이 있어 조금 일찍 올라왔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지하철은 한산했다. 문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는데 방송이 나온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이랬다. ‘11일과 12일에 G20이 있다, 그 행사를 잘 치르기 위해 협조를 해야 한다, 거동이 수상한 자가 있으면 지하철 안에 있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신고를 해라.’

갑자기 내가 G20 행사의 성공을 위해 아무 일도 안했다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살폈다. 이럴 수가. 난 너무 놀라서 읽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하철 안에는 거동이 수상한 사람이 천지였으니까.





먼저 내 왼쪽 뒤 여자. 날도 풀렸는데 털코트와 털모자를 썼다. 털모자는 이어폰을 숨기기 위함이고, 털코트 아래엔 장총을 숨겼을지 모른다. 여자의 이마에 밴 한방울의 땀은 더워서가 아닌, 총이 발각될까봐서다.

그 옆,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남자. 난방으로 열차 안이 더운데 왜 손을 넣고 있을까? 혹시 권총이라도 숨긴 게 아닐까? 수상한 시선으로 째려보니 날 한번 쳐다보곤 시선을 돌린다. 분명히 뭔가 있다.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망타진을 위해 다른 곳을 둘러봤다.





내 오른쪽에 있는 남자는 휴대폰 문자를 열심히 보내고 있다. 아마 반체제 세력에게 결집할 장소를 알려주고 있을 것이다. 뭐라고 보내는지 알면 G20의 성공에 도움이 될텐데, 보려고 하니까 경계하는 눈치다. 역시 수상하다.

그 뒤. 머리털이 별로 없는 아저씨가 연신 머리털을 뒤로 넘긴다. 넘길 머리도 없는데 왜 그러는 걸까? 그건 신호다. 머리털을 앞으로 넘기면 오바마, 옆으로 넘기면 영국 캐머런 총리, 돌돌 말면 독일의 메르켈 총리에 대한 암살지시가 아닐까? 

그 옆의 붉은 스웨터는 당연히 좌파고-그게 아니면 요즘같은 때 붉은 옷을 입을 이유가 뭐겠는가?-배낭을 맨 중년남자도 여간 수상한 게 아니다. 양복에 배낭이라니, 그 안에는 G20을 반대하는 삐라가 잔뜩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깁스한 남자가 보인다. <무간도>를 보면 양조위가 깁스 안에 무선통신 시설을 갖추고 스파이짓을 하던데, 저자도 혹시? 눈이 작은 것이 외모도 영락없는 스파이다. 

그러고보니 평일 오후에 지하철을 타고 배회하는 자들이 다 수상하다. 일터나 가정에 있어야 할 시각에 왜 강남 일대에서 이러고 있는 걸까?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체제전복을 노리는 좌파세력이 한둘이 아닌지라, 신고를 하다가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였다. 신고를 하는 대신 난 그냥 내려버리고 말았다. 

걱정이 된다. 내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만일 정상 중 누군가가 암살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범인이 장총을 가진 빨간 털코트의 여인이라면?

가수 ‘캔’은 “비겁하다 욕하지마/더러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내 상처를 끌어안은 그대가/곁에 있어 행복했다”라고 했지만, 내일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내 책임이고, 나한테 비겁하다고 욕해도 된다. 오늘 난 비겁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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