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염병 권하는 사회

검찰, 국정원, 그리고 남동생

 

 

어릴 적 얘기입니다.

제 동생은 당시 유행하던 로봇 장난감이 갖고 싶었습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네가 다음 시험에서 평균 90점 이상을 기록하면 사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평균 80점 정도는 받아오던 동생이었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습니다.

성적표를 나눠주는 날, 동생은 들어오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형아! 90점 넘었다!”

그렇게 갖고 싶어하더니, 결국 해냈구나 싶었습니다.

성적표에는 94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당시에도 예리했던 제 눈에 ‘9’ 란 숫자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의혹을 가진 전 각 과목별 성적을 확인했습니다.

90점을 넘은 과목은 딱 하나였고, 대부분이 70점대였습니다.

, 이거 고쳤지?”

동생은 잡아뗐습니다.

아니야. 나 이거 받자마자 바로 뛰어온 거야.”

하지만 동생의 얼굴에 어리는 곤혹스러움은 진실을 말해 줍니다.

그 성적표를 위조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요.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들어온 뒤 서울시 공무원이 된 유우성 씨가 알고보니 간첩이었답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수차례 밀입북해 탈북자 1만명의 신상정보를 북한에 넘겨줬다니 정말 나쁜 놈이지요.

그가 국정원에 긴급체포됐다는 뉴스를 보면서

댓글이나 다는 줄 알았는데 간첩을 잡다니, 역시 국정원이야라며 대견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1심 재판부가 검찰이 내놓은 증거에 모순이 있다면서 무죄를 선고한 거죠.

애써 잡은 간첩을 그냥 놔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검찰은 바로 항소했고,

유씨의 간첩질을 입증할 증거 3개를 법원에 제출합니다.

유씨가 북한에 드나들었다는 출입국 기록 말입니다.

그런데 법원이 중국 측에 확인을 해봤더니 검찰 문서 3건은 모두 위조됐다고 답변을 한 겁니다.

검찰은 국정원에서 받은 자료라면서 흥분했고,

국정원은 외교부를 통해 얻은 자료이니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파르르 떨고 있고,

외교부는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길길이 뜁니다.

다들 아니라고 하는 걸 보니 이 땅에서 암약하는 종북좌파가 저지른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네요.

 

2014214, 소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최종심이 열렸습니다.

노태우 정권의 강압정책에 항의해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가 강기훈 씨에 의해 대필됐고,

이는 당시 종북좌파들이 자살을 부추김으로써 사회불안을 야기하고자 한 것이라는 게 검찰 측의 주장이었지요.

강기훈 씨는 그 유서가 자신의 필적과 다르다면서 대필 사실을 부인했고,

검찰 측이 유죄의 논거로 삼았던 필적감정 책임자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은

다른 사건에서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을 한 혐의로 구속까지 된 인물이었지만,

재판부는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합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뒤, 재판부는 유서의 필적이 자신의 필체와 다르다는 강기훈 씨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범죄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았던 강기훈 씨의 억울함은 말로 못할 테지만,

그 판결이 내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검찰과 국정원은 일말의 사과도 하지 않습니다.

사과는 미안한 마음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미안한 마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니까요.

수십년 동안 증거를 조작해 무고한 사람을 집어넣는 게 일상화된 조직에서

유서대필조작이나 출입기록 조작 같은 일은 일말의 죄의식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겠지요.

 

성적표 위조사건의 주범이었던 제 동생은 그 후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은 좋은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찰과 국정원은 23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가짜 간첩을 만든답시고 열심히 위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본연의 임무인 진짜 간첩을 잡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전염병 권하는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정원,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24) 2014.03.02
진실의 입  (25) 2014.02.24
금요일엔 애국합시다  (17) 2014.02.13
윤진숙 장관의 빛과 그림자  (48) 2014.02.07
문재인은 왜 졌을까?  (59) 201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