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 교수는 꽤 오랫동안 ‘내가 죽기전에 존경한다고 꼭 말씀드리고픈 10명’에 포함돼 있었다.
그런 분이 작년에 그 명단에서 빠진 건 창비에서 팟캐스트를 같이 하느라
이미 말씀을 드렸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께는 강교수님 모친상 때 말씀을 드렸으니, 이제 8명 남았다).
첫 저서인 <헌법의 풍경>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분이 그렇게 훌륭한 분인 줄 몰랐다.
그리 잘생기지 않은 얼굴을 책 표지에 싣기에 “책 팔 마음이 없는 걸까”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 책이 꽤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안사고 버텼는데,
한 지인이 정말 좋은 책이라며 주는 바람에 결국 읽어 버렸다.
책을 덮자마자 김두식 교수의 팬클럽에 합류했고,
그분이 내는 책은 모조리 사면서 내 존경심을 보여드리고자 노력 중이다.
김두식 선생의 형님이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형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그 두분 중 김두식 선생이 내게는 훨씬 더 대단한 분이었다.
조곤조곤한 존댓말로 만들어진 책을 통해 내 나아갈 바를 밝혀주는 김두식 교수님을
난 서울대 교수 100명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 두분의 대담집 <공부논쟁>을 보니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책날개에 소개된 김두식 선생의 형 김대식 교수의 프로필 때문이었다.
1963년생인데 1994년에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된 건 내 판단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그 다음 구절이 문제였다.
“<피지컬 리뷰 레터즈> <네이처 포토닉스> <나노 레터즈>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사이언스> 등 여러 저널에 논문을 기고했다.”
하는 일을 보면 그렇지 않은 거 같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난 학자고, 그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학자의 정체성 중 하나는 유명한 저널에 논문을 싣는 분에게 약하다는 점이다.
우리 기생충학계에 삽십이세의 나이로 <네이처>에 1저자로 논문을 실은 분이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린 그를 만날 때마다 90도까진 아니지만 60도 정도는 고개를 숙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사이언스-네이처-셀 중 하나인 그 사이언스에 논문을 실었다니!
나머지 학술지들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학술지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은 평균 인용빈도인데,
내가 내는 학술지는 높아봤자 2가 고작이다.
김대식 교수가 논문을 실은 학술지의 인용빈도를 보자 (2012년 기준).
-피지컬 리뷰 레터즈: 7.9
-네이처 포토닉스: 27
-나노 레터즈; 13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10
-사이언스: 31
이런 우주적인 학술지에다 논문을 내는 김대식 교수를 ‘정체성은 학자’인 내가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본문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박사급 연구원 두명, 석박사과정 대학원생 열명, 스태프 한명, 비서.행정요원 각 한명, 대충 15명 정도 되는 연구팀을 이끌고, 주로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아서 일을 해요 (57쪽)]
이런 큰 규모의 연구팀을 이끄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년 엄청난 규모의 연구비를 받고, 또 연구비가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팀의 연구비 규모가 1년에 5억 정도 될 거예요.”
학자의 정체성에는 연구비 많이 따는 교수한테 약하다는 것도 있는데,
5억 정도 받고, 또 사이언스 같은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교수라면,
내가 반드시 존경해야 할 분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담집에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 너무 모범생같은 김두식 선생에 비해서도 훨씬 매력있다.
“그냥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살 뿐이에요. 욕먹을 게 있으면 먹는 거고요...어쨌든 저에게 중요한 건 독립적인 사고입니다.”(45쪽)
언제 김대식 교수를 뵐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일 뵙는다면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저...제가 사실은 동생 분보다 형님을 더 존경하고 있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이런 것도 배신에 포함되는지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말이다.
*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말이 안나오는 현실 앞에서 글은 참 무력하더군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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