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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은 기생충

공직자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내 전공은 기생충학, 그 중에서도 고기생충학이다. 잘 보존된 고분이 발굴됐다는 연락이 오면 쪼르르 달려가 기생충알을 찾는 게 내가 하는 일이다.

얼마 전 진주에서 조선시대 묘를 찾았다기에 내려갔다. 관 안에는 여러 벌의 옷과 더불어 책이 한권 들어 있었는데, 그 책에 흥미가 동한 나머지 난 기생충알을 찾는 것도 잊어버리고 잽싸게 연구실로 돌아왔다. 책 제목은 <공직자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로, 공직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같았다. 옥편을 찾아가며 십여일 간 탐독한 결과를 아래에 옮긴다.

-공직자 하이커: 돈과 명예를 이미 가진 사람이 권력을 얻어 3관왕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나한테 356억 있으면 편하게 살지 왜 정치를 해?’라는 게 일반인이라면, 공직자 하이커는 권력을 통해 자기 재산을 두 배로 불리려는 사람이다.

-위장전입: 그 집에 살지 않지만 사는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결국 그 집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공직자가 되는 데 필수적인 코스다. 이 과정을 최소 다섯 차례 정도 반복하고 나면 당신은 어느 새 공직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병역의무: 왜구나 북방 오랑캐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것을 일컫는다. 위험하기도 하고 힘도 드니 공직자 하이커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피하되, 아무도 안하면 곤란하니 “신성한 병역의무”라는 설을 퍼뜨리는 게 좋다.

-땅투기: 토지 가격이 오를 것으로 생각되는 땅을 사는 게 흔히 말하는 땅투기지만, 땅값이 오른다는 걸 본인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좋은 일에 쓰려고’ 혹은 ‘노후를 보내려고’ 우연히 샀는데 알고보니 금싸라기 땅이었을 때를 공직자의 땅투기라고 부른다.

-골프: 긴 거리를 가방을 맨 채 걸어다니며 조그만 구멍에 막대기로 공을 쳐 넣는 행위. 일견 미개해 보이지만 부유층들이 환장을 하니 무조건 배우는 게 좋다. 조정업무의 80-90%가 골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설도 있다. 값이 좀 비싸지만 공직자가 되면 원 없이 칠 수 있다.

-관청 여직원: 주로 상관의 가사일을 보는 사람을 지칭하며, 상관의 허락이 있는 경우에만 관청에 나가 일을 볼 수 있다. 각 도마다 한명씩 있어서 도청 여직원이라고도 부른다.

-관용수레: 공직자와 그 일가친척이 필요할 때면 아무 때나 쓰는 수레로, 주로 공직자의 사모님이 머리를 하러 간다든지,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할 때 유용하다. 사모님의 허락이 있는 경우 공직자도 이용할 수 있다.



김태호 국무총리후보자가 25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형수인 유귀옥씨(왼쪽)가 답변하는 도중
곤혹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다. /경향신문 서성일 기자





-공금: 공직자가 자신이나 가족의 긴급한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 돈.

-다국적 가족: 글로벌시대에 맞게 공직자는 그 자녀, 특히 아들로 하여금 명나라국적을 취득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왜구나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명나라로 도망갈 수 있으니까.

-기억력: 공직자는 되도록 자신이 한 행동이나 말을 오래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까진 돼야 한다. 일반인, “이름이?” 공직자, “글쎄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해도 공직자들이 저래서야 어떻게 나라가 유지될 수 있을까?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다음 대목이었다.

-인사청문회: 국민 앞에서 보이는 일종의 쇼로, 공직자가 되기 전에 구경꾼들 앞에서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의례를 일컫는다. 유니폼만 달리 입었지 비슷한 애들끼리 편을 나눠서 한 팀은 공직자를 공격하고, 한 팀은 수비를 맡는다. 그러다보면 위장전입 열 번 한 사람이 “당신은 위장전입을 다섯 번 했으니 이조판서가 될 수 없소”라고 하고, 세 번 한 사람이 “그 정도의 흠결은 국정수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며 옹호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그래도 이 쇼가 중요한 이유는 백성들이 그 광경을 보고 나라가 제대로 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