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때 배가 나온 모습. 지금도 여기에 근접했다
월요일, 기생충학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두시간 동안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고 난 뒤여서 다들 배가 고팠습니다.
삼겹살 집으로 갔습니다.
연대 앞에 그렇게 맛있는 삼겹살집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평소 ‘삼겹살이 나를 살게 해주는 이유’라고 말하던 전
조조의 십만대군 앞에서 조자룡이 헌칼을 쓰듯이 젓가락을 휘둘렀습니다.
제 앞에 놓인 삼겹살을 다 해치우고 누룽지를 시키려는데
옆 테이블, 그리고 그 옆옆 테이블에서 미처 굽지 못한 고기를 제 테이블로 건네 줍니다.
전 다시금 조자룡이 됐지만,
마지막 대여섯 점은 솔직히 힘이 들어군요.
수요일날, 간만의 사우나에서 체중을 달아보니
제 체중은 생애 최고, 전문용어로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이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에 덜 먹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결심을 하나 합니다.
채식만 하기로요.
먹는 걸 줄여서 다이어트를 하는 건 수도 없이 실패했지만,
채식으로 배를 채워가며 하는 식생활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목요일 점심 때, 조교선생과 나가서 냉면을 먹었습니다.
12시에 먹었는데 2시부터 배가 고팠습니다.
서울서 일이 있었는데, 일을 마친 뒤에는 허기가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었습니다.
김치찌개집에 들어갔습니다.
맛도 좋았지만 고기가 많이 들어있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그 고기를 먹는다면 그게 뭐 채식이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먹은 냉면에도 분명히 고기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냉면을 먹고 난 뒤 육식을 했다, 이렇게 말하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치찌개에 고기가 있다고 그게 육식은 아닌 겁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규칙이 범죄자를 만드는 것처럼,
너무 엄격한 채식은 오래 지키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참에 지속 가능한 저의 채식 원칙을 정했습니다.
1) 음식에 고기가 몇 점 딸려 나온다고 해서 채식이 아닌 것은 아니다.
2) 밥에 불고기 몇 점이 있다고 채식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건 ‘백반’이지, 육식은 아니니까.
3) 닭은 조류다. 따라서 삼계탕을 먹는 게 채식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4) 내 뜻과 관계없이 고기집에서 회식이 잡히는 경우, 분위기를 깨지 않을 정도의 고기는 먹어 줘야 한다. 내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선 안되니까.
제 스스로 ‘관대한 채식’이라 이름붙인 이 원칙이라면 몇 달이고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오늘 저녁에는 모임이 있고, 장소는 고기집입니다. 딱 스무점만 먹을 생각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체중이 줄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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