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식 여부를 청와대가 불법으로 조사했다는 의혹에 대해
검찰이 내린 결론은 ‘혐의 없음’이었다.
엘리트 집단인 검찰이 냉철하게 판단한 결과이니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민정수석실, 교육문화수석실, 고용복지수석실 등 청와대의 각 기관이 동원돼
그 아이가 채 총장의 아이가 맞는지 조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분들이 처음에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우겼던 것으로 보아
자신이 하는 일이 떳떳한 게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나중에 걸리니까 “정상적인 특별감찰이었다”라고 발뺌했는데,
검찰은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단 한번도 소환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채
청와대의 해명을 그대로 옮겨 적은 수사결과를 발표했단다.
경향신문 등 좌파언론들은 이때다 싶어 검찰의 눈치보기를 욕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검찰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에 있다.
처음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처음에 시달리는 게 바로 ‘받아쓰기’.
선생님이 불러주는 문장을 한 획도 틀리지 않고 제대로 받아써야 훌륭한 학생이었다.
난 “안돼요”랑 ‘안되요’ ‘베게’와 ‘배게’ 등등을 잘 구별하지 못한 채
50-60점 정도의 점수를 얻었지만,
받아쓰기를 잘하는 아이들은 “이런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느냐”며
틀리는 애들이 이해가 안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듯 받아쓰기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아이들이 나중에도 계속 공부를 잘한 채 사회의 엘리트가 됐다.
그렇게 본다면 엘리트 중에도 엘리트인 검찰은 얼마나 받아쓰기를 잘하는 집단이겠는가?
선생님이 부르는 단어 하나하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그 실력으로
청와대가 하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썼다가 수사결과로 제출하니,
검찰이 권력에 약한 것처럼 보이는 거다.
우리나라 국어교육의 또 다른 괴이한 점은
저자의 의도를 알아내는 게 굉장히 강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용운님이 쓴 ‘님의 침묵’은 사실은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저자의 갈망이 담겨있는 시고,
이육사 시인의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가져다 줄 영웅’ 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품을 볼 때마다 “저자의 의도가 뭐지?”를 궁금해하는데,
저자의 의도는 어김없이 시험문제에 출제가 됐으니,
의도를 잘 파악하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잘했고, 나중에 다 엘리트가 됐다.
청와대나 국정원을 비롯해서 권력기관에 근무하는 이들이 다 이런 분들로,
이분은 높은 분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했고,
특별한 명령이 없어도 자기 판단대로 윗분께서 필요로 하는 일을 했다.
4.5미터짜리 기생충을 빼내 줬더니 “내 몸에 이런 게 있었다는 걸 정말 몰랐다”고 했던 환자처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마다 높은 분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나는 몰랐다”고 하는 건
다 우리나라 국어교육 덕분이고,
이는 국정원이 직원들을 시켜 현 대통령에게 유리한 댓글을 달게 한 사건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대형 사건들이 배후를 찾기 어렵고, 개인적인 일탈로 수사가 마무리되는 이유다.
하지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저자의 의도가 꼭 맞는 것은 아니다.
경향신문에 “개 기르지 맙시다”라는 칼럼을 썼는데,
그게 외람되게도 중학교 교과서 중 하나에 실려 버렸다.
동료선생의 딸이 알려줘서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나중에 그 딸이 “글을 쓴 의도가 뭐냐”고 묻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말이지, 사람들이 개를 너무 쉽게 기르니 그만큼 또 쉽게 버리잖아.
평생 책임지겠다는 사람들만 개를 기르면 좋겠다는 뜻이야.”
나중에 내 글의 요지를 묻는 게 시험문제로 나왔기에 딸은 신이 나서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적었지만,
세상에 이럴 수가. 국어 선생은 그 답을 틀리다고 채점했다.
“이건 반어법이야. 개를 사람들이 더 많이 기르자는 뜻이라고.”라는 설명과 더불어서.
그 선생님이 내게 의도를 묻지 않고 혼자 단정한 것처럼,
청와대 등 권력기관의 직원들이 의도를 지레짐작해 일을 벌이다 보면 혼자만 감옥에 가는 수가 있다.
그러니 앞으로는 권력기관에 근무하는 분들이 개인적으로 일탈하지 말고
불법적인 일을 할 때마다 꼭 높은 분께 물어보고, 문서 등으로 그 증거를 남기시라.
혼자 추측하는 의도는 틀릴 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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