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는 애인 사이에 초콜릿을 주고받는 날이지만, 애인이 없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초콜릿을 교환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 덕분에 난 매년 밸런타인데이마다 초콜릿을 한 다발씩 받곤 했는데, 그런 내게 2007년 화이트데이는 좀 우울했다. 초콜릿을 못 받아서가 아니었다. 심성이 착한 학교 여직원들이 많은 초콜릿을 안겨주긴 했지만, 문제는 그 초콜릿이 너무 쓰다는 데 있었다. 그들이 준 초콜릿에 다량의 카카오가 함유됐던 것이다.
초콜릿은 단맛에 먹는 건데 쓴 초콜릿이 말이나 되는가? 카카오 함량이 50%인 것은 때린다고 협박하면 먹을 만했지만, 99%를 먹을 바엔 차라리 맞는 게 나을 정도였다.

카카오가 몸에 좋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건 2006년 9월, 스크랜턴대학의 연구자들이 “초콜릿은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강력한 항산화제”라는 연구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한 직후였다. 그들이 말하는 초콜릿은 그냥 초콜릿이 아니라 카카오가 많이 함유된 이른바 고카카오 초콜릿으로, “나쁜 지방인 저밀도 지단백(LDL)과 콜레스테롤이 낮아지고, 좋은 지방인 고밀도 지단백(HDL)이 증가됨으로써 심장병 예방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효과는 카카오에 폴리페놀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그 양이 폴리페놀로 톡톡히 재미를 본 적포도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란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항산화제이니 암을 예방해 주고, 충치를 예방할 뿐 아니라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비만의 주범인 초콜릿이 다이어트까지 책임진다니 너무한 거 아닐까?
하지만 사람들은 카카오에 열광했고, 제과회사들은 앞다퉈 카카오 함량이 높은 초콜릿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2007년 2월은 카카오 열풍이 절정에 달한 때여서, 카카오가 들어있지 않은 초콜릿은 아예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며칠 전 아내에게 줄 화이트데이 초콜릿을 사러 가게에 들렀다. 혹시나 싶어 둘러봤더니 고카카오 초콜릿은 당최 보이지 않았다. 내가 결혼한 거 말고, 그 3년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고카카오 초콜릿은 사양길에 접어들어, 오리온은 고카카오 제품 생산을 중단했고 롯데도 생산량을 대폭 줄이고 있단다. 심장병과 암을 예방하고 다이어트도 시켜주는 좋은 초콜릿인데 갑자기 왜? 제과업체 측은 “초기에 이슈화됐던 카카오의 효능이 몸에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자 소비자들이 외면하는 상황”이라고 말했지만,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암과 심장병의 예방효과가 그새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되고, 설마 다이어트 운운한 걸 진짜로 믿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보다는 “우리 국민들의 냄비기질이 가장 잘 발휘된 해프닝”으로 정리하는 게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연구는 인간이 아닌, 쥐를 대상으로 한다. 쥐한테 카카오를 많이 주면 입맛이 없어져 적게 먹게 되고, 다들 알다시피 소식(小食)은 장수의 지름길이니 몸에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게 카카오에 들어있는 폴리페놀의 영향이라 해도, 쥐에게 나타난 만큼의 효과를 사람이 보려면 99%짜리 초콜릿 수백개를 매일같이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연구라는 걸 무조건 맹신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론플레이에 유난히 약한지라 “뭐가 몸에 좋단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쓴 초콜릿이 자취를 감춘 건 나 같은 초콜릿 애호가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게 사람들의 각성이 아닌, 냄비기질 때문인지라 입맛이 쓰다. 카카오 50%짜리 초콜릿을 먹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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