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기생충학의 시대다”
학생 때, 기생충학교실에 들락거린 적이 있다.
원하는 교수 밑에서 3주간 연구를 할 수 있는 ‘선택의학 수업’ 때 평소 친분이 있었던 기생충학 교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 특출난 점은 없지만 본과 2학년 때 ‘킬리만자로의 회충’이라는 드라마를 쓴 적이 있어서 그런지
교수님은 내가 기생충학에 남아서 후사를 잇기를 바라셨고,
어느날 나랑 마주앉은 자리에서 기생충학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21세기는 기생충학의 시대”였다.
막상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리 큰 감흥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기생충학을 하게 된 건 “나중에 일자리 걱정은 없다”는 그 다음 말씀에 혹해서였는데,
나는 물론이고 나와 같이 기생충학을 선택의학으로 택한 친구도
지금 ‘교수’ 소리를 들으며 대학에 근무하고 있으니,
기생충학을 택한 게 꼭 후회될 건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대가 개막됐어도 기생충의 시대는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난 그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틀린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2005년, 김치에서 기생충의 알이 발견됐다.
기생충학자란 타이틀을 단 사람은 한번씩 언론사의 마이크 앞에 섰고,
난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게 바로 이거구나!”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기생충학의 봄날은 너무 짧았고,
불과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기생충학은 다시 잊혀져 가는 ‘사양산업’이 돼 있었다.
2014년 7월, 평상시 잠잠하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인이었다.
“큰빗이끼벌레라고 아세요? 강에서 그게 발견됐어요.”
어렴풋이 들어본 것도 같았지만 전문가답게 모른다고 했다.
“아니 기생충학자가 그걸 모르세요?”
그는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나 싶어서 인터넷을 찾으니 뉴스는 온통 큰빗이끼벌레로 도배가 돼 있었다.
위키백과를 찾으니 원래 북아메리카에 있던 놈인데 우리나라에도 온 거다.
왜 갑자기 우리나라에 왔겠는가? 우리가 ‘각하’라 칭하는 그분이 재임기간 중 벌인 4대강 사업이 그 원인이리라.
“사람에게 별 해가 없다”는 말에 안심하고 화면을 닫으려는 찰나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배수로를 막을 수 있고, 비린내가 나는 원인이 된다.”
더 읽어보니 이런 말도 있다.
“물속의 입자를 없애 줌으로써 단기간에는 수질이 깨끗해지지만,
장기적으로는 algae(조류)의 증식을 촉진할 수 있다.”
화면을 닫고 생각했다.
“그때 날 꼬였던 교수님은 이걸 예언하신 게 아닐까?”
김치 파동이 오래지 않아 잠잠해진 건 김치로 인해 회충에 걸린 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만,
4대강이 지속되는 한 큰빗이끼벌레는 계속 남아있을 테니까.
재임기간 내내 풍부한 소재로 칼럼을 쓰는 데 도움을 주신 각하는
퇴임 이후에도 기생충학계에 빛을 비추고 계신다.
내가 각하를 존경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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