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쇼에 유명 관상가가 나온 적이 있다.
출연자들의 관상을 하나씩 봐주던 관상가는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한다.
“이분은 현대인의 얼굴이 아니라 고대인의 얼굴입니다.”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농담하는 것같진 않았지만,
생전 처음 듣는 그 말에 난 그냥 자지러졌다.
다른 출연자들이 “국사책에 나오는 보부상의 얼굴을 닮은 거 같아!” “네 시대로 돌아가라” 같은 말을 하는 차에
관상가는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빨리 현대인의 얼굴을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 관상가가 바로 이분....
그 말을 들을 땐 웃느라 다른 생각을 못했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눈이 좀 작다 뿐이지 내 모습은 정말 보부상과 닮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내가 어려서부터 느꼈던, 내 외모에 대한 이질감은
시대를 뒤쳐진, 수백년의 세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갑자기 그 관상가의 예언이 새삼 떠올랐던 건,
<관상>에서 수양대군으로 나오는 이정재의 분장을 했을 때였다.
갑옷을 입고 머리띠를 동여매고 콧수염을 붙이자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지켜보던 분장사 분들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나타났다.
“이러니까 정말 잘생겼어요!”
“꼭 이정재 같아요!”
거울을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 그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내가 왕이 될 상이더냐? 말해 보거라. 내가 왕이 될 상이냔 말이다!”
그 관상가 덕분에, 그리고 난데없이 했던 분장 덕분에,
난 내가 원래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게 됐다.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외모를 갖고 있긴 해도,
내가 살아내야 하는 시대가 현대인만큼 거기 걸맞게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
중세에서 1992년으로 와버린 기사를 그린 장 마리 감독의 <비지터>를 보면
요즘 시대에 중세 기사처럼 행동하는 건 무지 우습기 짝이 없는데,
내가 남의 집 문에 서서 “이리 오너라!”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상상만으로 우습다.
장 마리 감독의 비지터 중
아는 분 중 40년 전에 살다가 갑자기 요즘 시대로 시간여행을 해버린 분이 있다.
수백년까진 아닐지라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요즘 시대를 감안하면 40년의 세월은 결코 적지 않은데,
그분은 자기 행동을 요즘 시대에 맞추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비지터>의 기사가 주위 사람들에게만 민폐를 끼치는 데 비해
그분은 아주 높은 자리에 오른 탓에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중이다.
최민의 시사만평입니다
하필이면 그분 주위에는 그분과 같이 시간여행을 한 사람들만 포진돼 있어
그분 스스로 시대의 지체를 전혀 못느끼고 있다는 게 비극이라면 비극,
컬투가 베란다쇼에서 내게 했던 그 말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싶다.
“당신 시대로 돌아가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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