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사례 1. 한 남자가 대변을 보다가 5㎝쯤 되는 조각들이 변기물 위에서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기생충이라고 생각한 그는 회충약을 복용했지만, 그 조각들은 두 달 후 또다시 기어나와 그를 좌절시켰다. 병원에 입원해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아 봤지만 그 조각들로부터 벗어나는 데 실패한 그는 결국 우리 과에 연락을 했다. 진단 결과 그가 걸려 있던 기생충은 아시아조충으로, 그가 베트남에서 돼지 간을 먹을 때 들어온 것으로 추정됐다.
사례 2. 또 다른 남자가 대변을 볼 때 느낌이 이상해 변기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50㎝쯤 되는 기다란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생충임을 직감한 그는 회충약을 먹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기다란 물체는 시시때때로 대변을 통해 기어나와 그를 아연하게 했다. 결국 그는 내과 외래를 통해 우리 과로 왔고, 3m가 넘는 벌레가 그의 몸 안에 들어앉아 몸의 일부를 내보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기생충의 이름은 광절열두조충이었고, 이 벌레가 나오기 몇 달 전에 먹었던 생선회가 원인으로 추정됐다.
사례 3. 한 여성이 변기 안에서 기생충의 조각으로 의심되는 물체가 헤엄치는 걸 보고 놀라 자빠졌다. 약국으로 달려간 그는 약사가 주는 대로 회충약을 먹었지만, 석 달 후 또다시 같은 조각이 나오자 좌절한 채 병원 외래를 찾았다. 진단 결과 그 기생충은 사례 1과 같은 아시아조충이었다.
이 세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마디가 있는 기다란 벌레, 즉 촌충에 걸려 있었고, 촌충이 내보내는 몸의 일부를 변기에서 발견해 감염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이들은 모두 약국에 달려가 회충약을 먹었지만, 몇 달 뒤 다시 같은 게 발견돼 좌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대체 왜 회충약에 죽지 않았을까? 촌충은 장 속에 박혀 있는 머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 원래 길이만큼 자라게 되는데, 회충약은 촌충 몸의 일부에 타격을 주고 머리를 제거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머리를 제거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디스토시드(혹은 프라지콴텔)라는 약을 딱 한 알만 먹으면 아무리 긴 기생충이라 할지라도 하루 정도면 박멸된다. 디스토시드는 원래 디스토마약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촌충에도 엄청난 효과가 있으니까.
하지만 약국에서 촌충의 조각을 보고도 회충약을 내미는 건, 디스토시드가 의사 처방약이기 때문이다.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내줄 수 있는 기생충약은 회충약이 유일하기에, 회충약이 기생충약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약사들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어떤 회충약은 ‘광범위 구충제’, 즉 한 알이면 모든 기생충을 박멸한다고 선전하고 있으니, 환자들 역시 회충약에 대해서만 알 뿐 디스토마약에 대해선 거의 모르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2004년 전국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들에게 유행하는 요충을 제외하면 회충약에 잘 죽는 기생충은 극히 미미한 수준인 반면, 디스토마나 촌충은 낮게 잡아도 150만명 이상에게 감염되어 있단다. 게다가 간디스토마는 담도암 발생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1군 발암물질’로 지정되어 있는 판국이니 이런 기생충 치료가 우선되어야 하건만, 사람들은 봄·가을로 회충약을 먹는 것으로 기생충에 대한 걱정을 끝내려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기생충에 걸린 사람들이 병원에 가기보단 약국을 찾기 때문이지만, 디스토시드가 의사 처방을 받아야 하는 약이라는 것도 한 단초를 제공한다.
만일 디스토시드가 회충약처럼 일반약으로 분류되어 의사 처방 없이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지금처럼 쓸데없이 회충약을 먹는 일이 줄어들고, 현재 3%대를 넘나드는 기생충 감염률도 줄어들지 않을까? 물론 약은 의사가 처방하는 게 원칙이지만, 우리나라의 기생충 감염 상황이 과거와 달라졌고, 디스토시드 복용 시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된 바도 없으니 국민 건강 차원에서 디스토시드의 일반약 전환을 한번쯤 고려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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