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염병 권하는 사회

맥락과 띨띨 사이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하면 뭐든지 영어로 해보고 싶어진다. 엄마한테 “맘”이라고 한다든지, 오렌지를 “어린쥐”라고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마찬가지로 좀 어려운 단어를 알게 되면 써먹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유행하니 갑자기 ‘공정사회’를 들고 나온 어떤 분처럼 말이다.


문제는 그게 맥락에 맞지 않을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외환위기 때 갑자기 ‘모럴 해저드’란 말이 유행했다. ‘도덕적 해이’로 번역된 그 말은 화재보험에 들고 나서 불조심을 덜하게 됨으로써 집을 홀라당 태우는 경우처럼 최선을 다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없을 때 생기는 태만함을 지칭한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의 기사는 이랬다. ‘은행원이 은행 돈을 갖고 도망가는 등 사회 전반에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 고객이 맡긴 돈을 은행원이 가져가는 건 범죄일 뿐 도덕적 해이가 아닌데도 우리 언론들은 어떻게든 그 말을 쓰려고 안달을 했으니, 모럴 해저드란 말이 그렇게 멋있게 보였나보다. 미국드라마가 유행하자 갑자기 ‘시즌 2’라는 구호가 전 매체에 울려 퍼진 것도 그 한 예다.


그거야 귀엽게 넘어갈 수 있지만, 노무현 정부 5년 내내 보수세력이 외친 ‘잃어버린 10년’은 내 상식으로 이해하긴 힘들다. 원래 그 말은 부동산과 주식가격이 폭락해 수많은 은행과 기업이 도산하고 성장률이 0%에 머물던 1991-2002년 사이의 일본경제를 지칭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임기를 합치면 10년이 된다는 걸 알아차린 우리나라 보수세력이 갑자기 ‘잃어버린 10년’을 외치기 시작했다. 2007년 정권이 교체된 건 그 구호가 먹혀든 탓도 있는데, 문제는 그 기간 동안 대체 뭘 잃어버렸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거덜이 난 나라를 물려받아 1년 반 만에 IMF를 졸업하는 등 경제를 살렸고, 노무현 정부는 고유가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1인당 국민소득을 2만불로 올렸는데 말이다. 현 정부 들어 주가가 폭락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7,000달러로 하락하고 주가가 폭락하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1997년으로 돌아가자는 게 현 정부의 목표인가보다 했는데, 작년 말 가까스로 2만달러 선을 회복한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이 말은 경제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한지라, 현 정부는 “잃어버린 10년 때문에 연평도 포격 사태가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진정한 포퓰리즘은 이런 것?


요즘 보수세력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는 ‘포퓰리즘’이다. 노무현 정부 때도 간헐적으로 쓰이던 이 단어는 근래 들어 민주당이 초등학생들한테 밥값을 안받겠다고 하자 쓰임새가 많아졌고, 대통령은 물론이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대부분의 대화를 이 단어로 해결한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능력 이상으로 퍼주자는 이념을 포퓰리즘이라고 한다면, 무상급식에 드는 돈이 우리나라의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액수인지 의문이 든다. 하기야, 4대강처럼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주로 해온 현 정부로서는 국민들이 찬성할 만한 어떤 일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할 만하다. 하지만 재산정도에 무관하게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이 시행되고 있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밥을 먹는 것도 크게 봐서는 교육의 일환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상급식을 인기영합주의라 하는 건 맥락을 상실한 비난이리라.


생소한 단어를 배우고 나면 자주 써먹어야 제 것이 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뜻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사람을 우리는 ‘띨띨하다’고 말하며 배척한다. 영어를 막 배운 조카가 영어를 쓰고 싶어 안달이 난 건 귀엽기라도 하지만,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들이 저러고 있으니, 징글징글하다.

'전염병 권하는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려운 영어, 더 어려운 한국말  (5) 2011.03.23
한기총의 아이큐  (14) 2011.03.09
질문 기피하는 대통령  (11) 2011.02.23
아내의 수법  (6) 2011.02.16
대통령의 실수 '오! 주어!'  (19) 2011.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