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2월18일까지의 정황은 이렇다.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의 사이버 테러에 청와대 행정관이 관련됐다는 물증이 나왔고, 사건을 전후해 비서들 사이에 금품이 오간 사실도 확인됐다. 대통령의 형님인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이 7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는 게 밝혀졌고, 대통령의 사촌처남과 동서가 뇌물을 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사건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현 정부가 참 운이 좋다는 세간의 평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현 정부로선 김 위원장의 다소 이른 죽음이 아쉬울 거다. 그의 사망이 지금이 아니라 대선을 앞둔 내년 이맘때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우리 유권자들은 북풍만 불면 한나라당 계열에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1987년 대선을 10여일 앞두고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은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데 큰 공헌을 했고, 1996년 15대 총선 일주일 전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는 각종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했던 신한국당을 1당으로 만들어 줬다.
2000년대 들어 북풍의 위력이 감소했다고는 해도, 북쪽에 일만 생기면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주려는 경향은 아직도 존재한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현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북풍이 불면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주는 게 과연 합리적인 선택일까? 그런 선택을 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속엔 한나라당이 북한의 위협에 잘 대처함으로써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민주당보다 훨씬 더 잘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여기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면 그들의 선택이 충분히 합리적이겠지만, 지난 역사는 그게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6·25 이후 한반도가 가장 전쟁위기에 근접했던 건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미국인들은 전부 짐을 싸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CNN은 전쟁 상황을 생중계한답시고 휴전선에서 취재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시뮬레이션 결과 사망자 500만명을 포함, 사상자가 총 2000만명에 달하고 한반도가 다시 세계 최빈국이 될지도 몰랐던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당사자인 우리 국민은 아무것도 몰랐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 통사정을 하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반면 북한 함정 6척을 파괴시킨 1차 연평해전의 승리는 김대중 정부 당시인 1999년이었으며,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 때도 비교적 전쟁에 대한 공포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반도는 다시 불안해졌다. 천안함이 1번 어뢰에 피격당해 46명의 꽃다운 장병이 목숨을 잃었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남한 영토인 연평도에 ‘보온병’을 비롯한 170여발의 포탄이 북쪽으로부터 퍼부어졌다. 보복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 정부는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달라”며 애걸하기까지 했다니, 국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정부의 무능은 김정일 사망 때도 극명하게 드러나, 사망 이틀 후 북한 TV가 보도하기 전까지 국정원은 낌새조차 채지 못했다. 우리는 못 보는 북한 TV를 볼 수 있다는 것도 국정원의 능력이겠지만, 겨우 그 정도를 위해 1조원의 세금을 국정원에 퍼주는 건 좀 아깝다. 이 정부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이상에서 보듯 한나라당 계열이 국가안보에 더 능하다는 건 근거 없는 믿음이다. 그러니 북쪽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소신껏 투표를 하자.
2012년은 총선과 대선 등 중요한 선거가 포진한 해이니만큼 북풍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가 더더욱 필요하다. 앞으로도 북한이 우리나라 선거판을 좌지우지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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