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이 침몰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북한이 그랬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군사 전문가인 친구도, 그보다 더 전문가인 딴지일보의 펜더님도 ‘북한 어뢰에 의한 피격’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우리 배한테 어뢰를 쏠 집단이 북한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아내와 마트에 가서 잽싸게 라면 한 박스를 산 건 전쟁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였다.
그 이후의 상황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특히 청와대는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북한 개입은 없었다”라고 단정지었고, 국방장관이 국회에서 “북한이 그랬을 수도 있다”고 답변했을 때 쪽지를 보내 수습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은 사고 직후 속초함이 함포사격을 한 이유에 대해 “새떼가 맞다”라고 했고, “처음에는 안믿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그게 맞더라”라는 해설까지 덧붙여 줬다.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피로골절’이라는 설이 나왔을 땐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아는데 파도에도 그리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의 소행이 명백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이렇듯 감싸기에 급급했던 이유를 난 이해하지 못했다. 튼튼한 지하벙커에 숨어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던 대통령이 왜 그렇게 북한의 눈치를 봤던 걸까?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사태는 다시금 급변했다. 선거를 2주 앞둔 5월 20일, 합조단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발표했다. 4일 뒤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대북 심리전을 재개할 것이며,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즉시 자위권을 발동할 것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합조단이 내놓은 증거는 국민들을 납득시키지 못했고, 버지니아대 물리학과 이승현 교수는 그 증거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이 교수는 합조단의 증거가 조작이라고 했을 뿐 북한소행이 아니라고 한 적이 없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두 달도 안되는 기간 중 사고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조사결과를 발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지방선거에서 이기는 것에만 급급해 어설픈 증거를 내놓음으로써 의혹을 증폭시켰다.
"당시 북한의 주장대로 진실을 왜곡했던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용기있게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피격 1주기를 맞아 한 얘기란다. 우리 사회에 반성이 드물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가장 반성해야 할 분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날 슬프게 한다. 북한의 개입은 없었다며, 파도 때문에 그리 됐다면서 북한 편을 든 이는 과연 누구일까?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발표를 강요함으로써 국론분열을 가져온 이는 또 누구일까?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은 본성은 악하지 않은 유이치라는 젊은이가 상황에 휘말려 살인사건을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이 대통령도 본성은 착하디착하며, 오직 우리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는 그가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가 국민 일반의 정서와 괴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악인>의 주인공 유이치는 좋아하는 여자 한명을 목졸라 죽이지만, 지금 이 대통령은 많은 국민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본심을 몰라준다며 칭얼거리고 있으니, 이보다 더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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