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를 쓴 김이설 작가는 남편과 아이들이 자는 새벽 시간에야 식탁에서 글 쓸 짬을 낼 수 있다고 했다.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직장 다니는 엄마들이 애들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시키고 살림하고 회사 출근하는 걸 생각하면 제가 하는 일이 더 힘들까요?”
하지만 집안일에 초연한 채 글만 쓰는 남성 작가들을 생각하면 좀 억울할 법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심윤경 작가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몇 시간이 유일하게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데, 그러면서도 여성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내는 걸 보면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아무리 가전제품이 발달했다 해도 집안일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손이 많이 가고 반복적인데다 조금만 안 해도 티가 나는, 그러면서도 그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게 집안일이니까. 대부분의 남성들이 집안일에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작년 말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시민 가족생활 통계'를 보면, 여성이 돈을 벌건 안 벌건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남성 32%는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눠서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10%만이 이를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나마도 남자들이 하는 일은 설거지가 고작으로, 그 정도만 해도 가정적인 남편으로 칭송을 받는다고 한다. 여성들이 점점 결혼을 기피하는 건,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남편과 애들까지 돌보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새해 들어 요리를 배울 결심을 했다. 직장에 나가는 평일에는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더라도, 집에서 빈둥거리는 주말에는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요리를 하면 아내만 성가시게 할 것 같아 수강료를 내고 집 근처 요리학원에 등록을 했다. 지난 주말이 대망의 첫 시간이었는데, 최근 십년을 통틀어서 가장 열심히 들은 강의였다.
모집요강에는 ‘기초가 없어도 된다’고 했지만, 요리와 동떨어진 삶을 산 내게는 비빔밥을 만드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칼에 두 번이나 손가락을 찔렸고, 호박을 둥글게 도려내는 일은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내가 청포를 채 써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요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청포 다시 갖다 드릴까요?”
한 가지를 불에다 올려놓고 다른 한 가지를 준비하고, 그걸 하는 동시에 또 다른 걸 손본다는 점에서 요리와 실험은 일맥상통하지만, 요리가 실험보다 훨씬 더 정신이 없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아무 나물이나 던져 넣으면 비빔밥이 될 줄 알았건만, 모든 재료들은 데치고 조리고 볶는 등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그릇에 담기는 거였다. 그간 별 생각 없이 먹은 음식들이 아내의 정성이 깃든 종합예술이란 걸 깨달았다는 게 첫 강의의 가장 큰 소득이었다.
다음날 저녁, 배운 걸 실습해 본다면서 혼자서 장을 보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날 보면서 아내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썩 잘 만든 것도 아닌 비빔밥을 맛있다면서 먹어 줬다.
꼭 큰돈을 들여야만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내의 힘듦을 알아주고 그 힘듦에 동참하는 남편들이 많아진다면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줄어들지 않을까?
새해엔 나처럼 요리를 배우는 남성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남편의 가사분담이 국가적으로는 출산율을 높이는 첩경이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말년에 아내한테 구박받지 않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남성분들에게 한마디. 통계를 보니 십년 전에 비해 황혼이혼이 10배가량 증가했단다.
있을 때 잘하자.
제가 만든 비빔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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