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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권하는 사회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 가자

 

어느 일요일, 강연이 있어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은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서울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연희동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게다가 최소 7분 정도 발품을 팔아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는 이 박물관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이유가 뭘까?
볼거리가 많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자연사박물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
관장으로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2004년 개관한, 국내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이다.
하지만 지리적 한계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전시품이 부족한 탓에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2011년, 이정모 관장이 취임한다.
수많은 과학교양서를 집필하며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 왔던 그는
대형공룡인 아크로칸토사우르스의 뼈를 사오는 등 공룡을 이용해 아이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고 이곳에 공룡만 있는 건 아니어서
2층과 3층에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췄다지만 어른이 봐도 신기한 온갖 전시품들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인터넷을 보면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평이 많다.
하지만 이정모 관장의 탁월한 점은 전시품을 제대로 갖췄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박물관을 좋은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변모시켰다.
일주일에 최소 2-3차례 서대문박물관에서는 과학자들의 강연이 있다.
과학자들은 이정모 관장이 좋아서 적은 강사료에도 기꺼이 강의에 응하는데,
강의가 끝난 뒤엔 강사와 참석자 모두 박물관 길 건너편에 있는,
그 동네 유일의 음식점인 치킨집에서 생맥주와 프라이드치킨을 먹으며 못다한 얘기를 나눈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분들의 수준 또한 만만치 않아서,
언젠가 강연을 갔을 때 <불멸의 이순신>의 작가인 김탁환 선생님과
'하리하라'라는 필명으로 과학대중서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이은희 선생님을 만나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별 헤는 밤> <빅 히스트리>의 저자 이명현 선생님과
<멸치머리에는 블랙박스가 있다>의 저자인 황선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뒤풀이 시간에 우리나라 과학의 앞날에 대한 수준높은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한데,
그래서 어떤 이는 춘천에서 차를 몰고 왔고, 일산에서 온 분, 흑석동에서 온 분 등 수십명이 치킨집을 가득 메운다.
거기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정모 관장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연평균 4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명소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놀라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이정모 관장의 임기가 끝나고 다른 분이 오면
서대문박물관의 신화가 끝나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평생관장을 시키도록 서명운동이라도 할까요?"
그날 나온 이 말은 치킨집에 모인 모든 이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9위의 좁디좁은 나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 총액은 세계 11위이며,
1인당 GDP는 2만8천달러로 세계 28위다.
별다른 지하자원도 없이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면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별로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아우성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배가 뒤집혔을 때 신속한 구조를 하지 못해 수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메르스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나머지 OECD 국가로는 유일하게
186명의 환자와 36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시위의 자유도 점점 옛말이 되고 있고,
화장을 좀 진하게 해도 잡혀갈지 모른다는 게 꼭 농담만은 아니다.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그 상당부분은 그분의 책임일 텐데,
경제살리기에 매진하겠다던 그분은 엉뚱하게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일에 매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신화가 하나둘씩 깨지는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놀라고 있다.
게다가 그분의 임기가 아직도 2년이나 남았다는 것에 한숨을 쉰다.
그래서 난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줄이는 개헌을 하면 어떨까요?"라는 지인의 말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2년 뒤엔 좋은 세상이 오느냐면 그런 것도 아닌지라
총선을 앞두고 집안싸움에 한창인 야당을 보면서 다시 한숨을 쉬게 된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 가자. 거기서 공룡을 보고 있노라면 온갖 시름을 있게 된다. 잠시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