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이 필요한 이유



얼굴이 중요한 분야는 꼭 연예계만은 아니다. 내가 못생겨봐서 아는데, 얼굴이 후지면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물며 대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해야 하는 정치에서 외모의 중요성은 단연 두드러진다(그래서 내가 각하를 존경한다). 잘생긴 뉴스 앵커들이 정치권으로부터 끈질긴 구애를 받는 건 그 때문이다.

엄기영도 잘생긴 외모를 발판으로 정치권에 진출한 경우였다. 그는 1984년부터 3년간 파리특파원을 지냈는데, 당시 트렌치코트를 입고 센강 변에서 뉴스를 전달하는 모습 때문에 스타기자가 됐다. 그윽한 눈빛을 가진 그가 안개 낀 센강에서 긴 코트를 입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곳 여인네들도 아마 난리가 났을 거다.

이를 발판으로 엄기영은 뉴스데스크를 무려 13년이나 진행했고, 여세를 몰아 이번 재보선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강원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된 것. 그의 이력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외모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정치 철학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는 큰 차이로 여론조사 1위를 달렸다.

출처: 경향신문 웹DB


엄기영의 맞상대로 나온 최문순은 외모에 관대한 내가 봐도 못생겼다. 300킬로쯤 차를 몰아 도착한 마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시골 아저씨라고나 할까? 비록 그가 해직기자 출신의 국회의원으로 각종 언론악법과 싸우는 등 언론자유를 향한 일관된 삶을 살아왔지만, 그런 걸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게다가 강원도가 전통적인 한나라당의 표밭이고, 한나라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원봉사 여성들이 일당 5만원씩을 받고 ‘자발적으로’ 도민들에게 전화를 걸어 엄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까지 했다니, 이번 선거는 해보나마나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난 선거 당일 ‘정치권의 외모지상주의’라는 글을 써놓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신문을 보니 최문순씨가 당선이 된 거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못생긴 외모에 대한 동정표일까 싶기도 했지만, 한나라당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라는 게 모든 언론들의 분석이었다. 그랬다. 그건 심판이었다. 강원도에 봉사할 일꾼을 뽑는 건데 왜 정권 심판이 개입되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살다보면 심판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다.


“내년부터 만 5세 자녀를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보내는 가정은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모두 정부의 보육·교육비 지원을 받게 된다”

선거가 끝난 지난 2일, 정부는 국무총리 주재로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민주당이 무상급식을 들고 나왔을 때 정부와 한나라당이 “부자 아이도 공짜로 밥는다”며 거품 물고 반대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갑자기 이런 대책을 내놓다니 영 생뚱맞다.

그네들은 “무상급식과 다르다”고 하지만, 강남에 사는 부자 엄마들도 이번 조치로 보육비를 지원받게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더구나 지원액이 해마다 늘어 “2016년에는 월 30만원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라니, 재원 마련은 어떻게 할지 의문이긴 한데, 어찌되었건 서민들에게는 유난히 인색한 현 정부가 이런 정책을 시행한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한다. 강원도민들이 얼굴만 보고 엄기영을 찍었다면, 그래서 한나라당이 재보궐 선거의 승자가 됐다면 이런 정책이 나왔을까?

분당을에 출마한 손학규 후보가 강재섭 후보에 비해 더 훌륭한지 의문을 갖는 건 정당한 일이다. 아무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일지라도 알지도 못하는 이봉수씨에게 표를 던지는 게 꺼려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오만한 정권에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한다. 선거를 통한 심판이 필요한 이유다.

'전염병 권하는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럼니스트의 아내  (24) 2011.06.01
안상수의 커밍아웃  (11) 2011.05.14
심판이 필요한 이유  (14) 2011.05.04
영리병원을 경계한다  (1) 2011.05.03
감독, 그리고 대통령  (18) 2011.04.30
MB의 도량  (36) 2011.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