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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권하는 사회

아내의 수법



온라인 송금이 지금처럼 활성화되기 전 얘긴데,

어느 회사에서 연말정산으로 받을 돈을 직접 주는 대신 월급통장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난리가 났다.

결국 타협점을 찾은 게, 연말정산 환급금을 받을 통장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비자금을 만들려는 남편들의 노력은 이토록 눈물겹다.



"오늘은 내가 쏜다"며 기분내는 걸 좋아하는 나 역시

비자금에 대한 욕구가 아주 강렬하다.

근데 그게 잘 안 되는 건 아내 때문이다.

어떤 부인들처럼 눈에 불을 켜고 비자금을 찾아내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내는 내가 직장에서 어떤 보너스를 받든지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보너스가 생길 때마다 아내에게 갖다 바치는 이유는

보너스를 받을 때 아내가 해주는 퍼포먼스 때문이다.

돈을 손에 쥐고 퇴근을 하면 아내는

처음에 나팔을 부는 흉내를 내고

그 다음에 고적대가 행진하는 것처럼 팔을 흔들며 걸어서 나한테까지 와 손을 내민다.

내가 은행에서 찾아놓은 돈을 건네주는데,

그러고 나면 아내는 탐욕에 찬 표정을 지으며 돈을 세고,

주머니에 챙기고 난 뒤 포식이라도 한 것처럼 배부른 흉내를 낸다.

이 퍼포먼스는 돈의 액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 5만원쯤 주면 나팔만 불다 마는 것처럼

액수에 따라 행진하는 거리와 동작이 틀려지는 등 여러 버전이 있다.

이 퍼포먼스가 너무 귀여워

돈이 생길 때마다 아내에게 갖다줘야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물론 그걸 아내가 다 갖는 건 아니고,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10% 정도를 주도록 되어 있듯이,

아내는 그 보너스의 극히 일부를 내게 돌려준다.

외부강연료나 경향신문 원고료를 받을 때,

논문심사비를 받을 때 등 급여 이외의 돈이 생길 때마다

난 잽싸게 아내에게 전화해 "여보! 나 돈벌었어!"를 외치고

그날 밤의 고적대 퍼포먼스를 준비하라고 한다.


입원과 수술을 해서 그런지 여느 때보다 많은 연말정산 환급금을 받았던 어제,

난 손에 돈을 가득 쥔 채 퇴근을 했고,

액수가 평소보다 컸던만큼

아내는 현관에서 마루까지 이어지는 행진으로 보답했다.

이러니 카드 결제일마다 늘 마음을 졸여야 할지라도,

앞으로도 아내에게 보너스를 다 갖다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햇볕이었듯이,

"돈 숨겨놓은 거 있지!"라며 윽박지르는 것보단

내 아내처럼 귀여움으로 승부하는 게 남편의 비자금을 양지로 끌어내는 방법이다.

아내는, 고단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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