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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권하는 사회

어려운 영어, 더 어려운 한국말



한국과 유럽연합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동의안이 오류투성이란다. 단어 하나에 양측의 이해가 엇갈릴 수도 있는 중요한 문서에 오류가 있다니, 놀랄 일이다. 문제를 처음 지적한 송기호 변호사에 의하면 ‘any’와 ‘or’ 등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는 등 50군데 이상에 문제가 있단다.
‘영어란 게 원래 어려우니 번역이 잘못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속내를 들여다보니 그게 다가 아니다. 완구류의 비원산지 재료의 최대 사용 가치가 영문본에는 50%이지만 비준동의안에는 40%라고 적혀 있고, 왁스류도 20%와 50%로 서로 다르다.
영어만 공부하느라 수학은 게을리한 걸까? 그래도 이 경우엔 언어체계가 다르니 그럴 소지가 있다고 너그럽게 넘어가 주자.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얼마 전 ‘초과이익공유제’를 들고 나왔다.
대기업이 얻은 이익을 협력업체에 투자 형식으로 배분하면 정부에서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으로,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된다. 그런데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그런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한 이 회장의 불편한 심기가 느껴진다. 대기업과 협력업체가 상생해 보자는 제안이 졸지에 좌파 용어가 돼버렸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이 회장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낙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후한 평가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엊그제 신문을 보니 삼성의 사장단 회의에서 미래전략실장이란 분이 이렇게 말했단다.
“이건희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 때 한 발언에 대해 ‘진의가 그게 아니었다’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랬다. 평소 협력업체를 사랑하고 정부에 협조적인 이 회장이 그렇게 말했을 리 없는데, 이 회장의 말을 멋대로 해석한 언론과 독자가 나쁜 거였다.
 




조용기 목사도 마찬가지다. 이웃 일본에서 지진이 나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것과 관련, 사람들은 조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알고 있다. “일본은 다신주의 국가이고 무신론자도 많은 데다 물질주의가 발달해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런 것에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경고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핏 보기에 일본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경고의 의미로 지진이 났다는 의미로 읽힌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논객 진중권은 “이런 정신병자들이 목사질을 하고 자빠졌으니”라고 개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니었다. 순복음교회 측은 “지진 피해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기 위해 말한 것이 의도가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해명했다. 그럼 그렇지, 세계 제일의 신도 수를 자랑하는 교회의 목사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리가 있겠는가?
 




이런 논란을 겪으면서 받는 느낌은 한국말이 너무 어렵다는 거다. ‘거시기’라는 단어처럼 그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각하께서도 ‘광우병 파동’ ‘불교계 탄압’ ‘4대강 사업’ 등 중대 현안마다 “오해다”라며 답답함을 호소한 바 있다.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이라는 정의처럼 ‘오해’는 기본적으로 듣는 이의 책임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듯 이는 기본적으로 한국말 자체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될 측면이 있다.
서울대 미학과를 나온 분도 오해를 하는 판이니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우리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일수록 좀 더 쉽게 말해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도 그 의도를 금방 파악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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