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야, 미안해

 

 

2010224, 김연아는 벤쿠버 동계올림픽 피겨 경기가 펼쳐진 퍼시픽 콜로시움에 서 있었다.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김연아의 금메달을 기대했지만, 김연아만큼 금을 간절히 바란 사람은 없었을 거다. 피겨 싱글의 금메달이 당연히 그녀의 것인 듯 기사를 쓴 국내외 언론도 그녀에겐 부담이었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 경기를 펼친 아사다 마오가 73.78이란 높은 점수를 얻었으니, 그녀의 가냘픈 어깨에 올려진 부담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연아는 그 부담을 이겨내고 78.5라는, 피겨사상 신기록을 세운다. 프리에서마저 한 번의 실수없이 클린을 완성한 김연아는 경기가 끝나고 난 후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아사다 마오의 경기가 뒤에 남아 있었지만, 우리 모두는 알았다. 연아가 금메달을 땄다는 걸. 오죽하면 미국 해설자가 연아의 경기가 끝난 후 여왕폐하 만세라고 했을까?

 

 

 

김연아는 피겨에 대한 본인의 재능과 그걸 알아본 부모가 전 재산을 투자해 만든 괴물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 해준 건 그다지 많지 않다. 다른 스포츠종목처럼 국민의 세금으로 거액을 투자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녀가 고대에 진학한 건 일종의 특혜지만, 애당초 연아가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고, 고대가 피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애걸복걸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고대에 갔든지 말든지, 수업을 듣던지 안듣던지, 우리가 연아에게 기대한 건 오직 벤쿠버 금메달이었다. 연아가 금메달을 따던 순간, 거의 모든 이가 연아의 연기에 환호했다. 그날 밤 있었던 교수 워크샵에서도 화제는 단연 김연아였다. “멘탈이 정말 강한 얘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100% 실력을 발휘할 수 있지?” 즐거울 게 그리 많지 않은 세상에서 김연아는 우리 국민에게 준 축복의 선물이었다.

 

 

 

국민들이 원하는 걸 다 해줬으니, 이제 그녀가 어떤 삶을 살던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론 김연아가 다음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카타리나 비트를 능가하는 피겨 여제가 되는 걸 바라지만, 그러지 않는다 해도 그녀를 비난할 순 없다. 국민이 원하는 걸 한 개도 안한 분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나라에서, 우리에게 그리 큰 선물을 준 연아가 젊은 시절을 피겨에 바치느라 해보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즐기겠다면 그것도 예쁘게 봐주는 게 바로 염치다하지만 아니었다. 수업을 안들어 F학점을 받았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CF만 찍는다는, 그래서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뭉칫돈을 벌고있다는 비아냥이 이어진다. “교생실습이 쇼라는 황상민 교수의 발언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나마저 그의 이름을 알게 됐으니, 연아를 깜으로써 명성을 얻어보자는 그의 욕망은 100% 충족됐겠지만, 기본적인 사실조차 확인해보지 않고 남을 욕하는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놀라운 건 그 밑에 주렁주렁 달린 댓글들이 대부분 황상민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일까.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실린 김동률 교수의 글을 보니 연아를 까는 게 무슨 유행이 되버린 느낌이다. 스스로 자세를 낮추란다. 그동안 강의를 얼마나 들었는지 대학이 솔직하게 답하란다. 완전 어이 상실이다. 역시 고대를 나온 두산 김동주가, 현주엽이, 선동렬이, 그밖에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학생 때 강의를 얼마나 들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판에, 왜 김연아한테만 이러는 걸까? 만일 그녀가 대학생이 됐다는 이유로 충실하게 수업을 받으며 남는 시간에 스케이트를 탔다면, 그래서 올림픽 금메달을 못 땄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연아가 여왕에 등극하던 날, 난 김연아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연아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그래서 아사다 마오와 함께 금.은을 휩쓸었다면 얼마나 배가 아팠겠는가. 하지만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난 김연아가 차라리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2년 전 받은 선물은 싹 잊고 피겨의 전설로 남을 선수를 까기에 바쁜 그런 나라에서 태어난 건 연아에겐 정말 불행한 일이었다. 연아가 받았던, 받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받을 수많은 상처들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연아야, 정말 미안해.

'전염병 권하는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것  (22) 2012.07.09
외모로 놀리지 맙시다  (44) 2012.07.03
연아야, 미안해  (55) 2012.06.19
한국 현대사 충신 베스트3  (12) 2012.06.15
초장이 되고 싶다  (24) 2012.06.11
2-3년간 유망한 직업들  (25) 2012.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