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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사회

욕먹을 때 떠나라

그의 이력서를 본 사람들은 놀라 자빠졌다. 요르단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 친구는 24세의 나이에 내과의와 외과의 자격증을 갖고 있었고, 그때까지 발표한 논문이 무려 43편에 달했으니 말이다.
이런 화려한 이력서를 손에 쥔 그에게 여기저기서 와달라는 제의가 쏟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는 이름난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의 논문은 죄다 남의 논문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했으니까. 결국 그는 병원에서 해고를 당하고 이라크로 도망갔는데, 그 후 종적이 묘연하단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에 등장하는 엘리아스 알사브티의 사례다. 1980년 과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이 사건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알사브티가 쓴 방법은 이랬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제목만 바꿔 다른 학술지에 투고한 것.

아니, 심사하는 사람은 그게 표절인지 아닌지 모르나?
모른다. 나도 몇 번 심사를 해봤지만, 표절 여부를 아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8000개나 되는 의학저널을 다 찾아볼 수도 없는 데다,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있는지라 표절이나 조작이 있었으리라곤 생각지 못한다. 가끔씩 과학자들의 표절사건이 보도되곤 하지만, 그건 극소수의 문제일 뿐 대다수의 과학자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표절을 당한 당사자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알사브티의 행각은 더 오랫동안 계속됐을 것이다.
중요한 건 표절이 드러난 즉시 알사브티가 해고되었다는 것. “그들은 대책회의를 열었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떠나줄 것을 요구했다.”

논문을 표절해 교수직에서 해임되는 건 국내에서도 드문 일이 아니다. 몇 년 전에는 KAIST 출신의 과학자가 8편의 러시아 논문을 베낀 게 들통나 해임되었는데, 표절을 저지른 과학자에게 무거운 처벌이 뒤따르는 이유는 과학자가 신뢰를 저버리는 일을 가장 죄질이 나쁜 범죄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전여옥 의원이 <일본은 없다>의 표절 보도와 관련된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전 의원은 이 책이 유재순씨의 자료를 베꼈다고 보도한 오마이뉴스 때문에 명예가 훼손됐다며 5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졌다. “유씨가 일본에 관한 책을 출간할 예정이라는 사정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전해들은 내용과 소재 및 아이디어 등을 무단 이용해 책의 일부를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는 게 재판부의 견해다.
그러니까 초고를 본 적도 없다던 전 의원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됐다면 하루빨리 국민에게 사과하고 정계를 떠나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어찌된 게 전 의원은 아무런 말이 없다. 몸이 아파서 그러나 싶었는데, 패소 판결이 난 다음날 영등포 신년회에 참석한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평소 말하기를 즐겨 수많은 안티 팬을 거느리고 있는 분인 만큼, 조만간 입장을 정리해주길 기대해 본다.

물론 전 의원은 과학자가 아닌, 직업상 거짓말을 밥 먹듯 해야 하는 정치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자료를 베껴서 책을 내는 게 용납돼서는 안 된다. 더구나 전 의원은 이 책 하나로 명성을 얻고 지금 국회의원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유수 학술지인 ‘네이처’에 논문을 실어 교수가 된 사람이 그 논문이 표절이란 게 밝혀진다면 학교를 떠나는 게 옳은 것처럼, 전여옥씨도 정치판을 떠나야 마땅하다. 내가 이러는 건 내가 사는 영등포에도 좀 괜찮은 국회의원이 있기를 바라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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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촌철살인 2012.12.04 16:02

    지난 총선 때 여옥이 누나가 떠난 자리에 소망교회 선규형이 들어가려고 했었죠..

    영등포는 저주 받은 곳인가 봅니다.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