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무섭다

2004년 3월12일, 대한민국 제16대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선거법 위반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대통령을 우습게 본 국회의 객기였다는 게 사실에 더 가까웠다.
금요일이던 그날 저녁,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국회 앞에 모여 그런 짓을 저지른 국회를 규탄했다. 이렇게 점화된 촛불은 다음날 광화문으로 이어졌고, 한 달 후 총선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진보·자유주의 세력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줬다.

2009년 5월29일, 대법원은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게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예정돼 있었다.

김용철이 쓴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구절을 옮겨본다.

“상식대로라면 대법관들이 영결식 장례위원이므로 선고를 연기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대법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당일 선고를 고집했다. 온 나라를 뒤덮었던 노 전 대통령 애도 열기에 이날 선고가 낳을 반발이 묻혀버리길 기대했던 걸까.”

이 판결로 이재용 현 삼성전자 부사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던 법적 걸림돌이 제거됐는데, 삼성 지배구조의 핵심인 에버랜드를 물려받는 데 낸 세금이 고작 16억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구린 판결이었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나라 높은 분들은 구린 일을 금요일에 하는 경향이 있다. 꺼림칙한 일을 해결하고 편안한 주말을 맞으려는 취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토요일엔 사람들이 신문이나 뉴스를 보기보단 놀러가기 바쁘니까 나쁜 일을 해도 매를 덜 맞는다는 꼼수일 것이다. 예를 들어 외환위기의 고통이 채 가시기 전인 2000년 12월1일 국회의원들이 세비를 13.4% 인상했는데, 그날 역시 금요일이었다. 무죄 판결이 나긴 했지만 얼마 전 한명숙 전 총리의 1심 판결도 금요일에 내려졌다.

금요일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커다란 행사가 있어 전 국민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을 때도 권력층이 큰일을 도모할 좋은 시간이다. 2010년 2월26일, 김연아 선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프리스케이팅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며 150.06점을 획득한다. 한 번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우승으로, 쇼트프로그램에서 얻은 점수를 합친 228.56점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만한 높은 점수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TV 앞에 앉았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하루종일 김연아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김재철이 MBC 사장에 임명된 건 바로 그날이었다. 김재철은 현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이른바 ‘MB맨’으로, 한나라당 행사에도 당당히 참여하는 등 친여 행보를 꾸준히 해온 사람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낙하산 인사가 방송을 장악할 의도에서 행해진 것임을 알 수 있을 거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자 슬픈 날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우승에 환호하는 사이에 공영방송 MBC가 국민의 손에서 이명박 정권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현 대통령이 정연주 KBS 사장의 해임안에 서명한 것도 박태환 선수가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인 걸 보면, 현 정권은 스포츠 행사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 같다.

월드컵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이다. 7월12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현 정부가 그간 미뤄둔 구린 일들을 싹 해치울까봐. 우리나라가 16강에 갈지 그리고 어느 팀이 우승할지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피는 것도 게을리하지 말자. 선거에서 패했다고 갑자기 착해질 현 정부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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