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코드


지난 2주간 날 사로잡았던 건 호주 멜버른에서 벌어진 호주오픈이었다.

직접 가서 볼 처지는 아니지만 집에 스타 TV를 달았고,

스타 TV는 호주오픈과 윔블던은 하루종일 중계를 해주는지라

설 연휴엔 하루 10시간이 넘게, 그 밖의 날들엔 오후 6시 경부터 매일같이 테니스를 보며 살았다.

 

어젠 그 마지막 날이었다.

조코비치와 나달은 역사에 남을 만한 멋진 경기를 6시간 가까이 펼쳤다.

경기 시간이 무려 5시간53분

경기는 조코비치의 승리로 끝났지만,

둘의 다리는 완전히 풀려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겐 안타깝게도 바로 시상식이 이어졌다.

관계자 두명이 짧은 인사를 하고 난 뒤

대회 스폰서인 기아의 CEO가 시상대에 올라온다.

이름이 토마스 오(Thomas Oh)라서 교포 분인 줄 알았는데

영어발음이 끝내줬다.

듣기가 엉망인 내가 말하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정도.


발음이야 그렇다 쳐도, 그의 연설에서 아쉬운 건 길이와 내용이었다.

선수들이 힘들어 죽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오래 연설을 하다니,

나달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했고, 조코비치도 연방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힘든 티를 냈다.

중계를 하던 해설자도 선수들이 안스러웠는지 "너무 길게 하면 안되는데요"라고 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주최측에선 둘에게 의자를 갖다줬고,

나달의 짜증스러운 표정은 그때서야 풀렸다.

 

길이도 길이지만, 기아 사장의 연설엔 유머가 없었다.

우리나라 CEO들이 공통적으로 유머가 없는 듯한데,

어제 그런 자리에서 서너번 정도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사실 유머란 게 꼭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다.


예컨대 마이크를 잡은 나달 선수는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굿 모닝!"

오후 7시 반에 시작해서 새벽 1시 반에 끝난 그 처절한 기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말이 있을까?

나달의 말에 관중들이 폭소를 터뜨렸음은 물론이다.

(그 뒤로도 나달은 웃긴 말을 더 했지만, 내가 알아들은 건 굿모닝이 유일했다).

 

나달의 말을 듣고나니 토마스 오의 연설이 더 아쉽다.

'오늘 경기로 호주오픈이 얼마나 훌륭한 대회인지 증명됐다'라든지

'기아가 이렇게 훌륭한 대회를 스폰서하고 있다' 같은 뻔한 말 대신

"나달과 조코비치 선수, 다리 아파서 힘들겠지만 좀 참으세요.

저도 막간을 이용해서 차를 팔아야 하니깐요"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게 아니면 "저도 이 대회 스폰서라 테니스를 좀 칩니다.

둘 중에 이긴 선수는 저하고 사실상의 결승전을 해야 상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면?

하지만 기아 사장의 재미없는 연설은 그만둘 듯 그만둘 듯 하면서 계속 이어졌고,

관중들은 중간중간 형식적인 박수를 쳐야 했다.

 



비단 CEO 뿐이 아니다.

외국 정상들이 연설하는 걸 보면 어쩜 그렇게 농담들을 잘 하는지,

딱딱하기만 한 우리나라 대통령들과는 비교가 됐다.

다른 나라들은 아마 삶 속에서 유머가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렇게 자연스러운 유머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물론 과거 대통령들 얘기고, 

지금 대통령은 다행스럽게도 엄청난 유머를 구사하는 분,

지난 4년을 되돌아볼 때 짜증이 난 적도 있었지만 대통령 때문에 웃어 본 기억도 얼마나 많은가?

'해봐서 아는데' 같은 전국민적 유행어도 만들었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같은 반어법은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래도 외국 정상들이 부러운 건, 그네들은 자기가 웃긴다는 걸 알면서 말을 하는 반면

우리 대통령은 그 사실을 모르면서 웃긴다는 것.

그래서 외국 정상들은 주위의 웃음에 자기도 같이 웃는 여유를 보이는 반면,

우리 대통령은 주위의 웃음에 당황해하거나 화를 낸다.

걱정되는 건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박 모 후보님은 유머와는 아주 담을 쌓은 분이라,

그분이 대통령이 된다면 의도 안한 웃음을 자주 줬던 현 대통령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도 언젠가는 유머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런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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