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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은 기생충

제닥을 소개합니다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 때,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웬 미녀분이 나한테 인사를 한다.

내 다음 차례 강사였던 그 미녀가 건넨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너럴닥터 정혜진

제너럴닥터라니, 그게 뭐지?

과거 전문의를 안따고 개업한 의사를 ‘General physician'(일반의)라 불렀는데

그건가? (실제로 그녀는 비뇨기과 전공의 과정을 중도에 그만둬, 일반의이긴 하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검색을 해보니 정혜진은 아주 유명한 의사였다.

같은 뜻을 가진 김승범 원장과 공동으로 개원한 제너럴 닥터

하루에 최대 20명만 진료를 하고, 환자 한 명당 30분씩 진료를 하는 게 원칙이었다.

환자들이 하는 말을 자르지 않고 다 들어준다는데,

자기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는 환자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환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병원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홍길동이 꿈꿨던 율도국이 한낱 이상으로 그쳤던 것처럼,

정혜진 원장의 꿈도 현실의 벽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외국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가 때문에 최소한 70-80명은 봐야 정상적으로 병원이 운영되는 나라에서,

3분의 1도 안되는 20명을 보면서 병원이 유지될 수 있을까?

제너럴닥터(이하 제닥)는 그래서 그 모자라는 돈을 카페를 하면서 채워넣는다.

실제로 그 병원은 카페처럼 꾸며놓았고, 고양이들도 몇 마리 돌아다닌다.

그래서 그 병원에 간 사람들은 카페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인데,

카페를 해서 버는 돈이 한계가 있는만큼

두 의사 모두 돈 버는 건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정혜진 선생이 제닥을 연 이유는 뭘까?

 

우리는 병원에 가서 빨리 의사를 만나고, 의사가 빨리 진단을 내려주고,

빨리 약을 타서 집에 오는 것을 하나의 패턴처럼 생각한다.

서로 시간이 절약되니 좋은 점도 있지만, 이런 방식은 상호간의 신뢰를 저하시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중이염에 걸렸다고 해보자.

중이염은 합병증이 없다면 그냥 놔둬도 낫는데,

의사가 좀 기다려보고 안좋아지는 조짐이 있다면 다시 병원에 데리고 오세요라고 했을 때

그 말을 충실히 따를 보호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애가 아픈데 약을 안주니 보호자는 불안하고,

의사 입장에서도 내가 약을 안주면 저 보호자가 날 불신할 테고, 다른 병원에 가겠지라는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호자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면 상황은 훨씬 나아지겠지만,

의사에게는 시간이 없고, 밖에는 다음 대기 환자들이 줄을 서 있다.

환자와 의사의 타협은 결국 안써도 될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항생제 내성이 강하기로 이름난, 나중에 쓸 만한 항생제가 없는 그런 나라가 됐다.

제닥의 30분 진료는 그러니까 이런 불필요한 항생제를 막아주고 지역사회에서 환자들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도전,

다행히 제닥은 올해로 6년째를 맞이함으로써 망하면 어쩌나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정혜진 선생은 의대에 다닐 때 수석을 도맡아 한 수재였고,

그래서 돈을 잘 버는 어떤 과도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그리 좋지 않았으니, 돈에 대한 욕심을 가질 만도 했다.

그녀의 도전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 환경을 뒤로 한 채 자신이 꿈꾸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고무적인 것은 그녀가 단국대 의대 출신으로, 한 학기에 불과하지만 나한테서 기생충학을 배웠다는 점.

얼굴도 마음도 예쁜, 그리고 기생충학도 잘 배운 그녀의 도전이 앞으로도 쭉 이어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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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산동주민 2014.02.05 12:16

    참으로 본받고 존경할만한 선생님들 입니다...교수님 덕분에 자세히 알게 되었네요^^;;

    • 서민 2014.02.05 15:55

      앗 이웃사촌님 안녕하세요
      제가 밑에 써놓은 것처럼 다 저한테서 기생충학을 배운 덕분입니다^^

  • CJK 2014.02.05 13:00

    참 의료를 실천하는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사람 사는 동네 냄새가 물씬 납니다.
    <제닥>이 입소문을 타서 롤모델이 되었으면 참 좋겠네요. 김-정 원장님 짱!!^^^

    • 서민 2014.02.05 15:56

      안녕하세요 CJK님
      제닥이 성공한다면 꿈에 도전하려는 분들이 더 많아질 것 같네요
      네티즌들은 저 두 의사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 성삼기 2014.02.05 14:53

    교수님 덕분에 재미있고, 깔깔거리고, 감탄도 해보고 ... 씁씁함도 맛보았는데...
    이런 감동도 선사해주시다니 배려심이 너무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 서민 2014.02.05 15:56

      성삼기님 안녕하세요 기생충학을 하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다, 이런 말도 있다지요^^ 제가 감사드립니다

  • 이준서 2014.02.05 15:37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환자에게 진료 시간 중 80% 이상을 대화 하세요. 시술을 그만큼 줄이란 얘기죠~
    제너럴 닥터에겐 맞는 말이긴 합니다.

    그런데,
    치과 쪽은 아닙니다. 시술이 그만큼 중요하죠.
    그러나 환자들은 자기 말을 많이 듣고, 많이 대화하는 의사를 선호합니다.
    말도 잘 하고 시술도 잘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말이죠.
    치과 쪽이 그렇단 얘깁니다.

    제너럴 닥터~
    이상이 좋으신 분이네요.
    현실도 그만큼 따라 주었으면 합니다.
    돈이 되어야 사람이 기도 필 수 있으니까요.


    • 서민 2014.02.05 15:57

      이준서님 설은 잘 보내셨나요
      치과 쪽은 좀 다르군요!
      마음 때문에 이가 아프긴 어려워서 그런 걸까요
      아무튼 치과 가는 분들은 대부분 이가 너무 아파서 죽기 직전까지 참다가 가신 분들이라 시술이 더 중요한 거 같아요^^

    • 이준서 2014.02.06 17:36

      보통 진단을 내리고 시술을 하지요.
      가정의학과 같은 경우는 진단을 내리면 시술은 약으로 하지만
      치과 쪽은 진단 후에도 시술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그래서 시술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단 얘기입니다^^

  • 세눈박이욘 2014.02.05 18:49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의료를 실천하시는 멋진 분들이시네요.
    제닥이 있는 곳에 사시는 분들이 부럽습니다.

  • 이현애 2014.02.05 18:59

    제가 사는 동네에도 그런 의사가 계셨는데...
    .
    추운 아침에 따뜻하고 잔잔한 감동이네요.

  • sjb 2014.02.05 22:47

    병원이 잘 운영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저런 식으로 진료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낮은 수가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환자를 받아야 하고, 진료는 성의없이 진행되고, 항생제 남용이 많이지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잘 해결되야 하는데. 녹록치 않은 환경이지만 병원이 잘 운영되길 바랍니다.

  • 촌철살인 2014.02.06 15:28

    아 마음이 따뜻하네요.ㅎㅎ 기분이 조으다...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할 상황을 칭찬해 줘야 하는 이 괴리감은 머죠..
    한국사회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희생쯤이야 당연하다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좋은 내용이지만 마음은 더 칙칙해지네요...그 놈의 돈이 먼지.....

    • 기생충서민 2014.02.07 18:14 신고

      촌철살인님, 저도 제닥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합니다만, 이렇게 안하는 다른 의사들이 꼭 나쁜 건 아니어요. 제닥이 대단한 거구, 제가 임상의사였다고 할 때 제닥처럼 할 수 있느냐면 그건 절대 아니거든요..ㅠㅠ

  • 2014.02.06 20:21

    제너럴닥터를 만드신 김승범님은 제닥에서 나오셨다는 글을 본적이 있는데... 예전에 장소가 실제 제닥은 아니었지만 제닥의 주요 특성을 반영한게 드라마에 나왔을때는 반가웠어요...

  • 이현숙 2014.02.07 04:23

    우리나라에 저런 병원이 있다니 놀랍네요~ 진심으로 환자들이 원하는게 저런 병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운영이 되어서 부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 삐따기 2014.02.07 09:35

    이런 병원이 있었군요..
    아이가 중이염 때문에 병원가서 항생제를 처방받고....... <--------- 우리 아이 일상...
    당연할 줄 알았어요..

    잘 되서 많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국내 현실상 쉽진 않겠죠??

  • 든든 2014.02.07 12:55

    결론이 마지막부분에 있네요 ㅋㅋㅋ

  • 열혈팬 2014.02.07 22:02

    앗! 저는 두분 부부이신줄 알았는데^^ 서민교수님 제자였다니...그 스승에 그 제자군요~~~교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공송한 세배~^^~올립니다. ㅎㅎ

  • 구아바 2014.02.10 20:23

    너무 재밌고 유익한글
    서민 교수님 팬 될 것 같습니다 ^^

  • 동희 2014.02.22 20:19

    아 저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요.. 라디오에서였나..
    카페와 병원을 겸해 진료를 아주 오래 봐주는 곳이 있다고...
    더 자세히 들여다 보니 더 멋진 비전을 가지고 있네요.. ^^

  • 동희 2014.02.22 20:19

    아 저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요.. 라디오에서였나..
    카페와 병원을 겸해 진료를 아주 오래 봐주는 곳이 있다고...
    더 자세히 들여다 보니 더 멋진 비전을 가지고 있네요.. ^^

  • 김민서 2014.02.25 20:11

    몸의 병 이전에 마음을 어루 만져주는 의사, 환자가 인간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의사...세상이 점점 좋아지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어 마음 따뜻합니다.

  • 류희현 2014.02.26 00:25

    제너럴닥터는 아니지만, 중이염도 감기처럼 2주후 저절로 낫는게 80프로라는 동네병원이 있어요. 참 바른말하는 분이신데, 아기엄마들은 자기네 요구에 잘 맞게 적당히 항생제 처방해주는 시설좋은 병원으로 옮겨가더라구요ㅎ

  • 차라투스트라 2014.02.28 11:10

    글을 다른 곳에다 복사해도 될까요?

  • brand identity designer 2016.04.08 04:38

    새로운 약국 브랜딩에 대해 공부하던 차에 제네럴 닥터에 대해 알게 되었고, 또 이내 그 실상을 조금씩 알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리서치 도중 이곳에 들렀는데, 마냥 기뻐할 만남은 아니지 않을까 한쪽만의 의견에만 치우치진 않을까 조심스럽긴 하지만 올리신 글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들어 링크 올려드립니다. 저도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나 한번 들러서 보실 가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http://generaldoctor.tumblr.com/post/88253099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