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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은 기생충

초등 교육의 필요성

조교 시절, 점심을 먹으러 중국집에 갔다. 교수님이 물으신다.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탕수육’이라고 말하려는데 교수님이 한마디 덧붙인다. “난 자장면 시킬 테니까 너희들은 마음대로 골라.” 여기저기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저도 자장면을 먹겠습니다.” 난 손을 들고 말했다. “저…곱빼기 먹어도 됩니까?”

아랫사람은 늘 윗사람의 심기를 살피게 마련. 자장면을 드시겠다는 교수님의 첨언은 이어지는 “마음대로 골라”와 무관하게 내 선택을 제한했다. “수직으로 누르는 단위 면적에서의 힘의 단위”를 압력이라고 한다면, 교수님의 말씀은 조교인 내게 압력이었다.

점심 한 끼야 자장면을 먹어도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압력이다.

예를 들어 신영철 대법관을 보자. 그는 법원장 시절 촛불시위 관련자의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에게 수차례 e메일을 보내 기존 집시법에 따라 신속하게 판결을 하도록 당부했다. 집시법 10조에 대해 위헌심판이 제청된 상태였고, 이런 경우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는 게 그간의 관례였다는 점에서 그의 e메일은 사실상 촛불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압력이었다.
그는 판사들에 대한 근무평정과 사건배당 등 여러 권한을 가진 법원장이었고, 실제로 해당 판사들은 “심리적인 부담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신영철은 자신의 e메일이 압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정도의 발언에 영향을 받는다면 판사라고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는데, 초등학교만 잘 나와도 알 수 있는 ‘압력’의 정의를 그가 모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위원장도 ‘압력’이 뭔지 잘 모르는 분인 듯하다. 작년 9월 취임 후 이런저런 언행으로 뜻있는 영화인들의 탄식을 자아냈던 그는 최근 각계의 사퇴 요구에 직면해 있다. 독립영화 제작지원사업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심사위원들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특정 작품을 선정해줄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칸 영화제 때문에 프랑스에 가 있던 시기에 그리도 뻔질나게 전화를 걸었고 해당 작품의 접수번호까지 불러줬다니, 어지간히 급했나보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의 말이다.

“작품번호와 작품제목을 명시한 뒤 해당 작품이 꼭 통과될 수 있게끔 부탁한다고 조 위원장이 말했다.”

청탁한 작품이 대단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본인이 직접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뽑아달라고 징징거렸다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신영철이 그랬던 것처럼 조희문 역시 자신의 전화가 압력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외압인지 아닌지는 “말을 듣는 사람과 하는 사람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는 말도 괴이하지만, “압력을 행사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반영되었느냐 안되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는 말은 범죄의 정의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강도짓을 하려다 실패하면 무죄가 되지만, 그렇게 우길 사람이 있을까봐 우리 법은 ‘미수’라는 항목을 만들어 처벌을 해온 것 아닌가? 조희문의 전화가 압력인지 아닌지는 초등학교 교육만 잘 받았다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초등학교를 의무교육으로 만들어 놓은 건 바로 이런 이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력’의 정의조차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더 심난한 건 신영철이나 조희문처럼 초등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일이 현 정부 들어 지나치게 잦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분’께선 압력이 뭔지 아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