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치명적인 병이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어떤 음식도 먹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충 다 먹을 수 있지만,
베트남쌀국수라든지 일본 옷을 입고 서빙을 하는 일식집 등 노골적인 외국식당은 가지 못합니다.
이게 입맛이 까다로워서가 아닌 것이,
라면을 잘 먹다가 휴지통에 버려진 라면껍질에 일본말이 쓰여 있으면 그때부터 속이 좋지 않습니다.
중국집 사장님이 중국말로 전화라도 받으면 젓가락을 놓으니, 이건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전 외국을 거의 가지 않습니다.
학회는 물론이고 해외연수도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끌려갈 때가 있긴 하지만,
그때를 회상해 보면 허기졌던 기억밖에 나지 않습니다.
2008년엔 아내가 이것저것 음식을 싸준 덕분에 굶지는 않았지만,
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도 사흘 내내 먹으니 질리더군요.
작년, 베트남에서 강연 초청을 받았습니다 (국제적 강사가 됐나봐요 ㅋㅋ)
음식 때문에 못간다고 거절을 했지요.
올해 또 부탁을 하는데, 이것마저 거절하진 못하겠더라고요.
최대한 일정을 짧게 잡아달라고 부탁해 2박3일간 3번의 강의를 하는 걸로 정했습니다.
올 때 갈 때, 그리고 잘 때 제게 과분한 융숭한 대접을 해주셨고,
청중들의 리액션도 좋아서 아주 만족스러운 여행이었지만,
먹는 문제는 여전히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쪽 분들이 저를 생각해 주느라 점심, 저녁을 모두 한식당에서 갔지만,
제 머릿속에는 “이건 베트남쌀이잖아!”라는 생각이 꽉 차 있어서, 죄송스럽게도 거의 먹질 못했습니다.
첫날을 그렇게 보낸 다음날 아침,
전 새벽 다섯시에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공복감 때문이었지요.
그래도 전 희망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싸준 진라면과 햇반이 있었고, 호텔에는 커피포트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꼼꼼한 아내가 이번엔 실수를 했습니다.
젓가락을 안싸준 거죠.
할 수 없이 저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호텔서 주는 조식뷔페에 갔습니다.
정말 많은 음식들이 진열돼 있었고, 다들 신이 나서 먹고 있었지만,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종업원들 눈치를 살피며 가지고 간 책에 포크를 넣는 데 성공했고,
그 느낌 그대로 제 방에 왔지요.
먹고 살기 위한 거지만, 부끄럽습니다. 이 포크는 제가 결국 공항 짐검사할 때 걸려서 빼앗겼습니다.
라면을 먹고 햇반을 말아먹을 건데,
전자렌지가 없으니 끓는 물에 2분 가량 넣어주면 됩니다.
그래서 일단 커피포트에 햇반을 접어서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물이 끓지가 않더군요.
알고보니 제가 햇반을 넣다가 그만, 흑, 커피포트를 망가뜨린 겁니다.
저렇게 됐습니다 ㅠㅠ
까 보지도 못한 채ㅠㅠ
기계치인 제가 그걸 고칠 수 있을 리 없고, 숫기도 없는데다 라면을 끓여먹는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직원에게 새 커피포트를 달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아침, 전 그냥 굶었습니다.
역시 한식당을 간 점심 때는 어쩔 수 없이 밥을 먹었지만,
양껏 먹을 수 없었기에 전 배가 고팠습니다.
제 허기짐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다른 지역에 가서 호텔을 잡았는데, 거기엔 멀쩡한 커피포트가 있었고,
이전 호텔에서 훔쳐온 포크도 있었으니까요.
베트남에 가서 처음으로, 진수성찬을 마음껏 먹었습니다.
이번엔 진라면이 아니라 설렁탕면....^^ 참치에 오징어채까지 이정도면 진수성찬 맞죠.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고, 그날 밤 잠도 아주 푹 잤지요.
그리도 다음날 또다시 비슷한 메뉴의 진수성찬을 먹었습니다.
그때가 아침 8시 경이었는데,
그 이후 전 하노이 공항에 도착한 8시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먹을 게 없나 싶어 가방을 열어보니 아내가 싸준 초콜릿이 있었어요.
해외에 간 적이 정말 거의 없지만 (신혼여행도 제주도..ㅋㅋ)
그래도 가장 잘 먹은 여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먹는 것 말고도 절 괴롭히는 게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무지 더웠고, 오후 다섯시에도 45도를 찍더군요.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나라 더위가 더위 같지 않으니, 다녀오길 잘한 거죠.
절 접대하느라 애써주신 하노이국제학교 선생님들,
까다로운 저 때문에 고생 너무 하셨지요. 이 기회를 통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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