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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권하는 사회

CSI 아내



출근하려고 지하주차장에 갔더니, 차 앞부분에 흠집이 나 있다.

형태로 보아 옆에 주차한 차가 나가면서 긁은 것 같았다. 

“아니, 요즘 세상에 이래놓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나?”

아내에게 CCTV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고 갈 길을 갔다. 

사방이 CCTV인 세상이니, 범인 잡는 건 시간문제 아닌가.

하지만 관리사무소에 다녀온 아내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확인해 보니까 내가 차를 세운 라인의 CCTV가 5일 전부터 작동을 안했대.”

어이가 없었다. 

왜 하필 5일 전부터?

이거 혹시 국정원 아닌가 하는 생각도, 아주 잠시지만 들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 차엔, 차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 고가의 블랙박스가 달려 있으니까 (차는 50만원 추정, 블랙박스는 27만원).

퇴근하고 나서 난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다.



흰 차량이 나오면서 내 차를 긁는데, 

블랙박스 영상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안타까운 것은 주차장에 설치된 조명 탓에 

맨 앞이 54라는 것 이외엔 차량번호가 보이지 않았던 것. 

그래도 상관없었다. 

주차장 다른 곳에 설치된 블랙박스를 확인하면 되니까.

하지만 얼마 전 아내가 전화로 알려준 소식에 식겁했다.

“지하주차장 다른 라인도 CCTV가 작동을 안했대. 

유일하게 출구에 설치된 블랙박스가 있는데,

거기선 사고시각 전후 30분간 흰색 차량이 나간 적이 없다네.”

어이가 없었고,

이거 혹시 국정원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금 오래 했다.



아파트 측은 전혀 해결해 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 같아

아내가 나섰다.

블랙박스 영상을 근거로 자문을 구한 끝에 차량이 흰색 그랜져라는 걸 알아냈다.

아파트 주민일 가능성이 더 높았기에 아내는 넓디넓은 지하주차장을 뒤졌다.

그리고 30분 뒤, 전화가 왔다.

“여보, 찾았어!”

54로 시작되는 흰색 그랜져가 다른 곳에 버젓이 주차돼 있는데,

그 차 옆에는 내 블랙박스 영상에도 찍혀있는 긁힌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어젯밤 새벽에 일어났을 때의 생각이 난다.

한시 반이 지났는데 아내는 컴퓨터로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느리게 봐도 번호판이 안보이네. 좀 더 느리게 해볼까?”

“360도 회전으로 한번 볼까?”

그 아내를 보면서 “아파트 보안팀장 열명보다 훨씬 더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내가 결국 해낸 것이다.

현재 아내는 보안팀장에게 차량 번호를 알려준 뒤 조회를 부탁해 놓은 상태이며,

조만간 자백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무능해 주민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겪고나니

국가가 국민에게 관심이 없어 국민들 스스로가 매사를 해결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오버랩된다.

국가가 잘 해야 아파트도 잘 되는 건가.